닉 수재니스

"철학은 놀라움과 함께 시작된다."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이 말은 만화에도 해당된다. 만화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버드대학교가 출간한 첫 만화책 '언플래트닝―생각의 형태'(책세상)의 최근 국내 발간을 맞아 미국 만화가 닉 수재니스(43·사진)를 이메일로 만났다. 수학자이자 전직 테니스 선수이자 예술비평가이며 만화가인 이 남자는 "만화는 글과 그림을 통해 생각의 다층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제목부터 그의 철학을 충실히 반영한다. "'평평하지 않게 하기(Unflattening)'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습관의 감옥에서 탈출하자는 구호입니다."

만화는 영어로 '코믹스(Comics)'지만, 작품은 코믹보다 고민에 가깝다. 분명 만화책인데 데카르트 '방법서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등 인문학적 인용이 쏟아지고 참고 문헌만 250권이 넘는다. 이 만화는 결코 쉬운 만화가 아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쿠제가 말한 비판 능력을 잃은 '1차원적 인간'을 그려내기 위해 만화 속 인간의 얼굴에서 이목구비도 지웠다. "영화 '스타트렉'과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상 등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장면이에요." 영국 작가 에드윈 에벗이 쓴 동명의 수학소설 '플랫랜드'(1884)는 이 만화의 주요 모티프. 2차원에 사는 주인공 '정사각형'이 3차원에서 온 이방인 '구(球)'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 얘기다. 총 8장의 각 스토리는 "고정관념을 뒤집으라"는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좁은 틀에 갇혀 비판 능력을 잃고 규격화된 인간을 표현한 장면.

그러니 닉이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박사 논문을 만화로 그려 제출해 통과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 아니다. 당시 박사 논문 제목은 '언플래트닝―다차원적 학습의 시각과 구두적 연구'(A Visual·Verbal Inquiry into Learning in Many Dimensions). 언어와 그림이 기존 이분법적 분류를 넘어 만화를 통해 동시에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드러낸 독창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논문을 발췌해 1년 정도 블로그에 올렸는데, 꽤 반응이 좋았어요. 그리고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연락이 왔죠. 책에 하버드·컬럼비아 명문대 도장이 박힌다면 제 작업에 더 큰 정당성이 부여될 거라 생각했어요."

이 책은 만화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만화의 개별 컷은 독특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로 통합돼 교향곡을 이뤄내죠. 파편화된 요소와 그 요소의 병치라는 이중적 특성을 지닌 만화야말로, 복잡다단한 인간의 사고를 표현할 미래의 매개체입니다." 지난해 미국서 발간된 책은 프로즈상, 린드워드 그래픽노블상 등을 휩쓸었다.

스케치북에 습작 수퍼히어로 만화를 그리며 세상을 창조하던 꼬마는 자라나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서 인문학부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그리기(drawing)는 "분리된 대상을 연결하는 행위"이자 "또 다른 교육의 방식"이다. 만화 속 대사 한 줄. "숨 막히는 대기를 가르는 한 줄기 불꽃. 타성을 향한 이 벼락은… 우리가 평면적 존재가 아님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