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그릇
방송인 윤영미씨는 알아주는 그릇 컬렉터다. 여행이나 출장지에서 하나 둘 모으다 보니 벽 하나를 장식할 정도가 됐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사람 같은 거죠. 마음에 드는 그릇으로 잘 차린 식탁에서 가족, 친구들과 나눈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거든요."
최근 몇 년 사이 명품·패션 업계를 지배한 '작은 사치(스몰 럭셔리)' 트렌드는 그릇 시장에도 이어지고 있다. 혼수 시장도 과거 '대량 세트 구비'에서 '필요한 것' 위주로 구매하는 실용성이 강조되다 보니, 값비싼 예단보다는 찻잔 세트같이 가끔 우아함을 뽐낼 수 있는 제품이 눈길을 끈다.
신세계 백화점 생활팀 박지연 부장은 "덴마크 왕실에서 쓰는 로얄 코펜하겐이나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 전시된 베르나르도, 하빌랜드같이 역사를 품은 제품은 왕실 궁정 문화를 가정에서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행을 타지 않고 높은 인기를 누린다"고 말했다. 굳이 비싼 세트를 구매할 필요도 없이 3단 트레이(쟁반용 접시)에 각종 과일이나 디저트류를 올려놓으면 영국 상류층이 즐기던 '애프터눈 티'의 한가로움을 느껴볼 수 있다.
인테리어 역할도 한다. 최근 '혼수의 강자'로 떠오른 에르메스 제품이 대표적이다. 담는 용도로도 쓰지만 그림이나 조각처럼 전시용으로 인기다. 롯데백화점 리빙팀 오세은 과장은 "해외 직구 등을 통해 해외 트렌드에 익숙한 주부들이 많아지다 보니 기존 북유럽 브랜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VBC카사), 포르투갈(코스타노바) 제품같이 유럽 전 대륙의 제품들이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신라호텔에서 쓰는 JL Coquet(코케)는 해외 직구족에게 특히 인기다.
14만여명의 앤틱 그릇 마니아를 보유한 인터넷 커뮤니티 '하이디 카페'엔 1942년에 세워진 행남사(행남자기)나 1943년 세워진 한국도자기의 초기 커피잔 세트를 갖고 있다든지, 3대째 물려받은 독일 마이센 그릇이나 일본 나루미, 노리다케 등을 자랑하고 싶다는 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유한나 연성대학 교수는 "과거엔 명품이라 하면 유럽 도자 브랜드를 떠올렸지만 요즘엔 외할머니가 쓰던 그릇처럼 이가 빠지거나 실금이 가도 세월에서 묻어나는 물건을 명품이라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한식당 '권숙수'에서 식탁 위 작은 소반을 놓아 색다른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처럼 집 안에서 버려두고 보지 않았던 물건들도 훌륭한 테이블웨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섞어야 매력
과거엔 포트메리온이면 포트메리온 중에서도 같은 꽃무늬가 있는 제품을 식탁에 올리는 게 전형적이었다. 최근엔 다른 소재, 볼륨, 질감의 제품을 불균형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인기다. 사기 용기에 주석 그릇을 곁들이거나 크리스털 잔을 올리면서 믹스&매치의 효과를 낸다. 바카라나 생루이처럼 200~300년 역사의 크리스털 전문 브랜드가 물잔과 식탁 장식품 등을 대거 내놓은 것도 그러한 이유다. 국내 자기 브랜드에선 유럽식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평평한 그릇을 내놓고, 유럽 브랜드에선 거꾸로 한국 소비자를 겨냥해 국·밥 그릇을 새롭게 디자인해 선보였다. 로얄 코펜하겐과 이딸라 등은 한국 전용 그릇을 내놓았는데 내놓자마자 매진됐다.
'소량 구매' 트렌드에 맞춰 국내 도예가들의 작품도 주목받고 있다. 이도나 광주요 등 국내 작가주의 브랜드가 인기를 끌고, 특급호텔에서 국내 작가 작품을 적극 이용하면서다.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에선 라기환, 이기조 작가 작품을 쓰고 있고, 파크 하얏트와 포시즌스 호텔은 김선미 그릇, 정소영 식기장 등의 그릇을 사용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은 올 연말 오픈할 대구점에 국내 작가 작품으로 구성된 매장을 새롭게 열 예정이다.
최근 눈에 띄는 트렌드는 유기(놋) 그릇의 인기. 제사 때 주로 쓰는 걸로 여겨지던 유기 그릇이 '대를 이어 물려주고 싶은' 테이블웨어로 주목받는 것이다. 현대백화점 홍보팀 이경훈 대리는 "유기 제품의 높은 인기에 백화점 추석 선물 세트로 나오기도 했다"며 "살균 기능이 있다고 알려진 데다, 유기를 쓰는 퓨전 한식당에 젊은 층이 몰리면서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음식에나 잘 어울리는 건 무늬 없는 흰색
해외 명품은 패턴 강해… 단순한 색감·모양 음식 어울려
[Editor's Pick] 전문가들이 말하는 "혼수 구성, 나라면 이렇게"
신혼살림이라면 파스텔톤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종류나 화려한 무늬의 그릇에 눈길 간다는 이가 많지만 살다 보면 ‘그게 아니구나’ 한다. 음식을 담다 보면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음식에나 어울리는 건 무늬 없는 흰색. 반사 효과에 음식이 돋보인다. 미색도 안정감 있고, 푸른색이 들어간 제품은 청량감을 줘 식탁을 산뜻하게 보이게 한다.
☞그릇과 음식의 조화 보려면 : 신세계 강남점 9층 ‘자주(JAJU) 테이블카페’. 모든 식기와 테이블웨어 모두 바로 옆 생활전문관 매장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사용하는 체험형 레스토랑이다. 식사를 하면서 테이블웨어를 경험해보고 마음에 들면 옆 매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지난 2월 오픈 뒤 8월 말까지 연관 구매율을 살펴본 결과 식당 이용 고객10명 중 7명이 식사 전후 생활전문관에서 상품을 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호텔 셰프가 조리하는 식당의 경우 9월 들어 개점 초기 일평균 매출의 두 배인 600만원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