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왕' '의형제' 박쥐' '밀양' '변호인' '사도' '밀정'...
20년 간 한국 영화 르네상스 관통하며 시대의 얼굴 창조
자신감은 진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태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이중스파이' 역 맡아
영화는 배우의 육체적 매력과 감정노동이 빚어내는 매우 독특한 공상물이다. 무성 영화 시절부터 영화가 산업화한 지금까지 어떤 면에서 배우는 영화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독이 배우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서사를 부여하며,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지는 공공연하게 영화의 전면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엔 배우를 향한 경외감(‘도둑들’ ‘암살’)이 류승완의 영화엔 친밀감이(‘베테랑') 느껴진다. 봉준호의 영화엔 배우를 향한 동지애(‘설국열차')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엔 혹독한 스승의 마음(‘박하사탕' ‘밀양')이 배어나오는 식이다. 물론 박찬욱이나 홍상수처럼 감독을 향한 배우들의 흠모와 헌신의 마음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개봉한 ‘밀정'과 작년에 천만 관객 신드롬을 일으킨 ‘암살'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군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 ‘암살'이 ‘친일파 암살’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향해 ‘한마음'으로 달려가는 영화라면, ‘밀정'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목숨을 연명해갔던 일본 강점기 ‘이중간첩'의 심리를 다층적으로 그렸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마다 그래왔듯이 ‘밀정'의 배우들에게도 ‘곤란한 인생'을 선사하며, 쉴 새 없이 윤리적 곤경에 빠트린다. 곤경에 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은 작가주의 감독의 단골 주제라지만,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스케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서사' 안에서 서로 어찌할 바 모른다는 인상을 받는다.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도 ‘놈놈놈'의 송강호도 행동의 동기를 모른 채 그저 스산하고 생경한 이미지 위에서 도망치거나 질주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화려한 우왕좌왕’이 할리우드를 설득한 김지운의 독특한 ‘누아르’ 문법이 됐다.
어쩌면 배우를 바라보는 김지운 감독의 일관된 심경은 ‘우유부단'이다. 그리고 천 겹의 표정을 지닌 이병헌이 ‘달콤한 인생'에서 김지운을 구원했듯, ‘시대의 얼굴'이 된 송강호는 ‘밀정'에서 또 한 번 김지운을 구원했다.
합당한 서사를 부여받지 않고도, 송강호는 스크린에서 차곡차곡 ‘개연성'을 만들어간다. 그가 누군가! 힘을 주어야 할 때 오히려 힘을 빼버리고, 힘을 빼고 있으면 별안간 상대를 힐난하는 이기적인 말투로 기습하는 ‘밀당의 고수'다.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별똥별처럼, 연극계에서 영화계에 홀연히 날아온 송강호. 탄생 설화가 될만한 그의 대사 “배신이야! 배신! 배반(‘넘버3’)!”의 선언처럼, 그는 20년간 줄곧 통념을 넘어서는 ‘배반과 전복의 연기'를 이어왔다.
‘멘탈 갑’ 배우답게 어찌나 매번 ‘천연덕스럽게 우겨대던지' 우리는 그가 역사극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떠들어도(‘관상' ‘사도'), 할리우드 배우들을 상대로 호기롭게 혼자 한국어로 말을 해도(‘설국열차')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밀정'의 초반부에서 송강호와 공유는 일본 경창철 경부와 의열단원 자격으로 서로를 감찰하며 이용하려 든다. 서로의 패를 감추고 간을 보는 첫 번째 술자리에서 공유가 은근슬쩍 “무슨 일을 하느냐?” 묻자, 송강호는 “나, 경무부 경부 이정출이요"라고 한 호흡으로 허를 찌른다. 극적 긴장을 툭 털어냄과 동시에 기선을 제압하는 송강호만의 전복의 마술.
끔찍한 고문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밀정'은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 시절이라는 어둠보다 이국풍의 신문물이 세팅된 1920년대의 세련된 풍경과 모던보이들의 낭만적 활극으로 스크린을 채운다.
송강호를 만났다. 만취한 밤을 보낸 듯 얼굴이 붉었지만, 잡은 먹이를 놓지 않는 맹수처럼, 허공에 던져진 질문 하나하나마다 노련한 답변을 이어갔다. 그는 1997년 연극계 선배 김의성의 주선으로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밀정'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듭니까? ‘스파이'라는 말이 갖는 영화적 힘을 느꼈겠지요?
“밀정이 품고 있는 그 미스터리한 뉘앙스가 좋았어요. 밀정이 누구냐는 질문보다 밀정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시대의 아픔을 담아서 더욱 좋았지요.”
-금기를 넘나들면서 삶의 피로감을 표현하는 데 송강호 만한 배우가 없지요. 초기작인 ‘쉬리’와 ‘YMCA 야구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기적 개가를 올렸다고 봅니다. 특히 최근작인 ‘사도'와 ‘밀정'은 스크린을 장악하는 에너지가 대단하더군요.
“‘사도'와 ‘밀정'에 연이어 출연한 것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요(웃음). 분명한 건 자연인 송강호가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적 인물에게 호기심이 많다는 거죠.”
-‘사도'의 유아인과 ‘밀정'의 공유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청년입니다. 전자는 ‘유아독존'의 자기애를 후자는 ‘공의'의 인류애를 대변한달까요. 유아인과 공유, 두 청년의 에너지는 실제로 어떻게 달랐습니까?
“먼저 두 청년은 천만의 관객 동원의 힘을 보여준 이력이 있지요(웃음). 말씀대로 유아인은 광기 어린 에너지가 대단했어요. 공유는(웃음)..., 부드럽고 맑은 에너지를 가진 친구예요. 열심과 열정은 우위를 가늠할 수 없었어요.”
-1920년대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영화가 많아지고 있어요. 탐미적인 영화 ‘아가씨'나 ‘해어화', 황실의 몰락을 다룬 ‘덕혜옹주', 독립군들의 활약을 그린 ‘암살'을 비롯해서… 일면 ‘밀정'도 그 유행의 일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시대를 이야기하려면 고증을 비롯해서 제작비가 많이 들죠. 돌이켜보면 그간 한국 영화의 질적 양적 팽창이 ‘암살'을 태어나게 했고, ‘암살'이 성공하면서 한국 영화 산업의 외연이 그만큼 넓어진 거예요. 저는 ‘암살'을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밀정’은 같은 시대를 다뤘어도, 시선이 아주 새로워요. 해석이 경직되지 않지요. 일본 경찰과 독립군 사이에 낀 이정출이라는 인물은 일종의 회색분자예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모르고 고뇌에 시달리지요. 사건에 휩쓸리면서 변화하는 한 인물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어요.”
-이정출은 ‘황옥'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어요. 1923년에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반입하려던 사건에서 일본 경찰과 의열단의 ‘이중스파이'로 지목받아 재판을 받은 인물이죠. 황옥의 진의가 무엇이었는가는 아직도 역사적 미스터리인데, 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습니까?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엇갈립니다. 어쩌면 중요하지도 않지요. 일제의 앞잡이였는지 아니면 일제에 정말 반역했는지 모르죠. 그는 혼란의 덩어리입니다. 저는 다만 그의 몇몇 행적을 토대로, 감정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소화하는 게 중요했어요.”
-관객들이 느끼는 핵심 정서는 ‘의심'입니다. 일본 편인 것도 같고, 독립군 편인 것도 같고…, 사람이 사람을 과연 믿을 수 있나, 저 사람 진짜 정체가 뭘까…, 상황은 스펙터클하나 그 고민은 매우 동시대적입니다. 현대인도 쥐 죽은 듯이 이리저리 ‘박쥐'처럼 사니까요. 어쨌거나 이정출이 마침내 한쪽 편으로 결단을 내린 직접적인 동기는 뭐라고 추정합니까?
“정말 어떤 분명한 특정 사건이 계기가 됐다면 영화의 매력이 떨어졌을 거예요. 개인도 작아 보이고 시대의 깊이도 얇아 보였겠지요. 중요한 건 갈등과 고뇌가 켜켜이 쌓여간다는 거예요. 첫 장면에서 독립투사를 잡을 때도, 이정출은 혼자 다가가 설득합니다.
“목숨은 건사해야 하지 않겠냐?” 비록 일경 옷을 입었어도 인간적인 갈등이 늘 있었던 거예요. 제가 연기하면서 느끼기엔 이정출이 마음을 정한 건, 여자 의열단원인 연계순(한지민 분)을 고문하고, 마침내 그녀의 시신을 목도하게 된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말이지요?
“네. 그 장면엔 김지운 감독의 회화적인 재능이 녹아있어요. 카메라가 가마니 밖으로 내민 작은 손을 비추거든요. 그 손이 단지 여자의 손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잡아줬어야 할 약자의 손이 아니었을까 싶은 거죠.
한 생명이 비참하게 죽었구나…, 그게 아니라 내가 저 작은 손 하나 잡아주지 못하고 외면했구나, 저게 내 민족의 작은 육체구나. 그런 회한이 차올라왔어요. 그 손은 저만의 클라이맥스였어요.”
-숨 막힐 정도로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반대로 그 긴장을 툭 하고 풀어버리는 힘, 둘 다 배우 송강호의 장기인데요. 특별히 어느 쪽을 더 좋아합니까?
“유머와 긴장을 계산하진 않아요. 우린 다 희로애락이 뒤섞인 삶을 살아가지요. 행복해도 우울함이 있고 웃다 가도 우울해지죠. 그렇지 않나요(웃음)? 가장 슬플 때 느닷없이 자연 발생적인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해요. 저는 배우로서 그런 감정을 좀 더 리듬감 있게 터뜨리는 것 같습니다.”
-스크린에서 주눅 들어 보일 때가 별로 없어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에서 나이트클럽 깡패로 잠깐 출연할 때부터 그랬죠. 일종의 자신감인데, 그런 자신감은 어떻게 생기나요?
“중요한 말씀이에요. 연기라는 게 뭘까? 질문해보면 한 인물에 대한 태도에요. 내가 그 인물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고 있느냐, 그게 자신감으로 나와요. 외적인 표현보다 본질적인 거죠.”
-‘사도'에서는 비 오는 날 가마 타고 가다 사도세자에게 독설을 날리던 장면이 좋았어요. ‘밀정'에서는 의열단장으로 나온 이병헌 씨와 새벽부터 상해에서 술 마시던 장면이 좋더군요. 아군과 적군이 제3국에서 배포 좋게 만나, 보는 사람 감정을 쥐락펴락…
“이병헌의 공이 컸어요. 8년 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함께 출연했는데, 출연 분량은 적지만 김지운 감독과의 남다른 의리로 출연을 해줬지요.”
김지운 감독의 웨스턴 무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이병헌은 ‘나쁜 놈’을, 송강호는 ‘이상한 놈’을 맡았었다.
-그보다 전 오히려 그보다 8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가 생각나더군요. 두 사람이 북한 경비 구역 초소에서 초코파이 먹으며 김광석 노래를 듣던 장면과 오버랩 되던 걸요.
“(감탄하며)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박찬욱 감독도 그런 말을 했지요. 정말 첫 만남이 비슷하네요. 금기시 된 장소에서 불현듯 맞닥뜨렸다는 점이. 당황하는 지점도 비슷하고.”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죠. 가히 불행의 전조입니다(웃음).
“그래요. 사내다운 의열단장 정채산이 16년 전 내가 맡은 북한군 오병필이고, 당황하는 이정출이 16년 전 이병헌이 맡았던 남한군 이수혁 병장이었어요. 둘이 상황만 바뀌었을 뿐.”
언젠가 박찬욱 감독이 말했다. “송강호는 답안지에 정답이 아닌 답을 적는 데, 그게 더 정답일 때가 있다”고. 항상 다르게 생각하고 비틀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는 그저 몸과 맘을 요리조리 던질 수 있게 가벼운 상태로 만들 뿐이라고 했다.
-한국 최고 배우 두 명이 붙였으니 현장의 기운이 만만찮았겠어요. 김지운 감독은 잘 이끌어 갔나요?
“김지운 감독은 미국 작품(아널드 슈워제네거와 ‘라스트 스탠드'를 찍었다)을 찍고 와서 그런지 현장을 훨씬 효율적으로 이끌어요. 합리적으로 바뀌었달까요. 예전 같으면 7~8번 갈 테이크를 4~5번 정도에 오케이하죠. 외형적으로는 괜찮아 보였습니다(웃음).”
-지금이야 두 사람 다 영화계 거물이 됐지만, 2000년 ‘반칙왕'을 찍을 땐 김지운 감독이나 송강호 배우나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가장 소심하던 시절이었죠(웃음). 김지운 감독도 ‘조용한 가족'이후 두 번째 작품이었고, 저는 첫 주연이었으니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건 여전히 둘 다 말이 없다는 거예요. 감독과 열심히 소통하려는 배우들도 있는데, 저는 좀 묵묵한 편입니다(웃음).”
-김지운 감독은 늘 그렇듯 이번에도 현장에서 께름칙한 상태에서 오케이를 했다고 하더군요(웃음).
“시원한 적이 없지요(웃음). 그런 상태에서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배우에게 감독의 ‘오케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오케이를 받으면 쾌감도 있죠(웃음). 하지만 전 이미 ‘오케이’에 크게 동요하지 않아요. 후배들에겐 격려의 의미가 되겠지만요. 오케이와 관련해 이창동 감독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이창동 감독이라면 배우들을 괴롭히기도 유명한 분인데요…
“그분이 그러더군요. “오케이는 없다. 오케이에 가까운 게 있을 뿐.” 힘 빠지는 말이지만 그게 정답이죠. 오케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일이나 그렇지 않나요(웃음)?”
-이준익 감독이 그러더군요. 송강호는 한계 없는 성취를 이뤄내는 존재이기에, 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케이 사인을 내리는 일뿐이었다고.
“이준익 감독은 너무 쉽게 오케이를 내립니다(웃음).”
-모두가 당신을 칭찬합니다. 너무 잦은 칭찬이 진부하게 느껴지지는 않나요?
“천만에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칭찬에 흔들리진 않아요.”
-후배들에겐 어떤 존재인가요?
“긴장하게 하는 존재겠지요. 25년 전 연극무대에서 연기할 때를 생각해보면, 긴장한다는 건 열정이고 행복입니다. 이번 현장에서도 수많은 배우가 긴장해서 행복했어요.”
-사투리가 살짝 가미된 다이얼로그도 좋지만, 송강호 영화의 압권은 연민과 우매, 회한과 통분의 표정이 아닌가 합니다. 송강호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살인의 추억'과 ‘괴물'과 ‘관상'을 잊을 수가 없군요. 가히 ‘한 시대를 요약한 얼굴'이며 ‘영화의 육체’라고 할 수 있는 그 표정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미소 지으며)부러 어떤 표정을 만들어 낸다기보다 그냥 조금씩 젖어 들어갑니다.”
-젖어 들어간다… 현대물과 시대극에서 표정의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까?
“현대인의 얼굴은 본능이나 욕망이 저 아래 숨겨져 있어요. 한결 무심하죠. 일제강점기 같은 시대는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적인지 아군인지 표정으로 판단을 당하니까요.”
영화 ‘반칙왕(2000년)'에서 김지운 감독은 송강호에게 가면을 씌웠다. 낮에는 소심한 샐러리맨이자 밤에는 가면을 쓴 레슬러로 사는 영화 속 주인공은 함께 사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그런 이중생활을 고백할 때조차 타이거 마스크를 쓴 채였다. 웃기고 슬픈 코미디 배우였던 송강호.
가면을 벗고 나서부터 송강호는 본격적으로 시대의 얼굴이 되기 시작했다. 스크린 배우로 사는 20년간 ‘우아한 인생'에서처럼 생계형 조폭의 얼굴일 때도 있었고 ‘박쥐’의 뱀파이어 신부처럼 금기의 얼굴일 때도 있었고 ‘변호인'처럼 순열한 양심의 얼굴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시대의 육체로 사는 그를 보는 동안 놀라웠던 건, 어떤 비통한 상황에서도 그가 한 번도 울부짖은 적이 없다는 거다.
비통을 느낄 때마다, 송강호는 오히려 고개를 들어 스크린 저 너머에 있을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저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형사의 얼굴로.
-오십이 되니 어떤 기분이 드나요?
“나이 먹는 게 서럽진 않아요. 젊음을 붙잡고 싶지도 않죠. 고단한 인생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다행인 건 한국 영화계가 풍성해져서 이제는 젊은이뿐 아니라 전 인생에 걸친 다양한 영화가 나온다는 거죠.”
-영화 이외에 즐기는 취미가 있나요?
“없습니다. 집에 있으면 멍하니 앉아 있어요. 그저 자그마한 산이나 올라갔다 올 뿐이에요(웃음).”
-무엇에 집착합니까?
“오로지 영화에만 집착합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도 영화를 촬영하지 않을 때도 항상 영화 얘기만 하지요. 찍어야 할 영화와 찍고 있는 영화에 대해서요.”
-왜 그렇게 집착하지요?
“모르겠어요. 끝없이 정리하고 확인하고 싶습니다. 영화에 관해서 만큼은. 그 외 다른 모든 일에는 무심합니다(웃음).”
감독의 오케이에 연연하지 않으며, 세간의 칭찬에 본질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는 송강호를 보며,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멘탈 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0년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스크린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 구태의연해진 우리 삶을 기습하겠지.
‘자신감은 내가 맡은 배역에 대한 진심에서 나온다'고, ‘그러니 당신도 당신에게 할당된 인생에 진심을 지켜주며 살라고. 윗사람의 오케이나 주변의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고’ 복화술로 속삭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