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일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두 정상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리는 라오스의 베인티안에서 양자회담을 갖기로 했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11시간 앞두고 이례적으로 이를 없던 일로 한 것이다.
정상회담 취소 소동은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리는 두테르테가 5일 라오스로 출발하기에 앞서 오후 4시(현지 시각)쯤 필리핀 다바오 국제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비롯됐다. 2000여명의 마약사범을 사살한 것과 관련해 오바마가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필리핀 토착어를 사용해 "(오바마에게) 푸탕 이나(개XX)라고 말해줄 것"이라고 답했다. '푸탕 이나'는 '매춘부의 자식' 또는 '개자식'이란 뜻이다.
두테르테는 이 말을 지난해 1월 프란치스코 교황과 지난 8월 필립 골드버그 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를 비난하는 데도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과거 필리핀 식민 지배도 비판하면서 "필리핀은 이제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고 우리는 오로지 국민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두테르테가 욕설을 한 지 3시간 30분쯤 뒤인 오후 7시 40분쯤 중국 항저우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폐막 관련 기자회견을 하면서 회담 취소를 시사했다. 그는 "참모진에게 현 시점에서 정상회담을 해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고, 6일 오전 5시쯤 네드 프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정상회담 취소를 공식 발표했다.
오바마는 기자회견에서는 두테르테를 "흥미진진한 사람(colorful guy)"이라고 했지만, 정상회담 취소로 자신의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상회담 취소와 관련해 "이번 사태는 보기 드문 외교적 불화"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201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취소한 적은 있다. 당시 러시아가 미 정보기관의 개인 정보 수집 활동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에게 임시 망명을 허용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도 몇 시간 전 취소는 아니었다.
두테르테는 오바마의 강경한 태도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기자들의 질문에 강한 어조로 답변한 것이 우려스러운 방식으로 번졌다"며 "미국 대통령을 향한 개인적 공격으로 비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테르테는 "오바마 대통령과 이견을 좁히기를 바란다"며 다른 시기에 정상회담을 재개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테르테로서는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미국의 힘이 필요하고, 경제협력도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을 비난한 것은 국내용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필리핀 국내 언론은 일제히 '자주 외교'를 강조했다. '마닐라 타임스'는 "필리핀이 미국의 가장 오랜 아시아 동맹국이지만 두테르테는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표현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닐라 불러틴'도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국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보도했다. 필리핀 네티즌도 '굳이 오바마를 만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등 90%의 지지율을 보이는 두테르테에 우호적이다.
오바마는 두테르테의 유감 표명으로 체면을 세웠지만, 마지막 아시아 순방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중국이 공항에서 이동식 계단도 준비하지 않는 등 홀대했고, 러시아와는 시리아 사태에 대한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시리아 내 미국의 우군인 쿠르드군을 기자회견장에서 공공연히 비난하는 등 성과가 전혀 없다. 이를 두고 '외교 레임덕(임기 말 지도력 공백 현상)'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필리핀과는 정상회담 취소 사태까지 갔지만, 지난 4월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 7월 존 케리 국무장관 등이 방문해 양국 간 동맹관계 강화를 다짐하는 등 그동안 들인 공을 헛수고로 만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지역 패권을 놓고 다투는 중국을 포위하는 데 필리핀에 있던 미군 기지도 주요 포스트다. 미국은 24년 만에 이 기지들을 다시 사용하기로 했다.
다만 미국 언론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도 언제든 미국과 갈등 관계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CNN방송은 "외교적 무시와 강대국 간 경쟁 속에 이뤄진 이번 순방은 오바마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물려줄 세계의 불안정한 본질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감안한 새로운 아시아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