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번 시내버스에서 우연히 엿들은 대화. 여든 가까운 할머니와 뉴욕 양키스 야구 캡을 쓴 20대 초반 유학생 손자다. "할머니는 왜 동네 마트 놔두고 시장엘 가세요?" "많이 살 때는 시장이 싸거든." "몸도 불편하신데 택시 타고 다니지 그러세요." "아니야, 너도 왔고 하니 쉬엄쉬엄 다니는 거지." 1979년부터 건어물 가게를 운영해온 장기봉 사장이 얘기를 꺼낸다. "강남이나 일산으로 이사 간 할매들이 마트 가격 보고는 놀라서 다시 와요. 싸게 사던 기억이 있으니 그 돈 내고는 못 사는 거죠." 경동시장의 첫째 장점이다. 싸다는 것!
둘째 장점은 금세 드러난다. 시장을 둘러보다가 차조기 잎, 밤, 대추, 쥐치포 등을 샀다. 웬만한 데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 외에 돌배, 으름, 산머루, 오미자, 국화차, 페퍼민트차 등을 구입했다. 둘째 장점. 없는 게 없다! 경동시장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희귀한 재료들을 만날 수 있다.
곧 추석이다. "옛날만은 못해요. 그래도 밤과 대추죠." 견과류를 취급하는 제성상회 정종국 사장은 말한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추석 채비죠." 임경자 사장도 얘기한다. "한가위 때는 역시 토란이에요. 그다음은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취나물. 어머니 시절엔 한 달 전부터 고사리를 삶아서 내놨는데 요즘은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아요." 더 이상 옛날 같은 한가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많이 사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산다. 대가족, 먼 친척까지 챙기던 추석은 옛이야기가 됐다. 시장에서는 그런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래도 경동시장의 오전은 멋지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저녁 산책, 파세자타(passeggiata)가 떠오른다. 대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슬로시티의 풍경. 시장 골목마다 한가하게 장을 보는 아주머니들. 느긋하게 걸으면서도 물건을 유심히 살핀다. 이내 흥정이 오간다. '아침 장'을 보는 이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낸 다음 잠깐 허리를 펴고 장 보러 다니던 전통적 일상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정보는 하나같이 경동시장이 1960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된 상인들이 꺼내는 이야기는 다르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장이 존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실 1960년은 시장이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문을 연 해에 불과하다. 이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경동시장의 '잃어버린 전설'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간다.
경동(京東)시장. 말 그대로 서울의 동쪽이다. 곁에는 옛 경춘선 열차의 시발역인 성동역(城東驛)이 있었다. 도성의 동쪽 역. 1939년도에 들어섰다가 1971년 사라졌다. 1938년부터 동경성역(東京城驛)으로 불리던 청량리역으로는 중앙선이 이어졌다. 경기도, 강원도 사람들이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들어왔다. 공터에 등짐을 내려놓고, 보따리를 풀고 좌판을 펼쳤다. 1960년 무렵 경동시장 구관이 완공됐다. 노점상들이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외관을 갖추자, 광성상가로 불리는 건너편 건물도 지어졌다. 80년대에는 경동시장 신관도 지었다. 이렇게 세 건물을 중심으로 경동시장은 확장 일로를 걸었다.
사방으로 뚫린 입구들. 어느 통로로 들어가도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건물 지하에는 수산물시장이, 2층에는 인삼상가가 숨어 있다. 비좁은 골목에 쇼핑객들과 수레, 자전거가 서로 엉키다가도 자연스레 풀린다. 유리 아케이드로 햇살이 들어온다. 없는 게 없다는데 무얼 사야 할까. 찬찬히 둘러보면 만물상에 온 듯한 기대감이 든다. 구하기 어려운 고완(古玩)을 싼값에 찾은 듯한 만족감.
미궁 같은 골목을 따라 들어갈수록 보기 어려운 재료들이 펼쳐진다. 자연산 고급 재료들이다. 서울 장안에서 가장 '핫'한 식당인 청담동 밍글스의 오너셰프 강민구와 경동시장을 찾았다. 가을 메뉴를 개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좌판에 깔린 물건들을 둘러보는 눈초리가 진지하다. 나물가게에서 민들레, 와송 등을 사자마자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와 연근을 사고, 강원도와 제주도 더덕 중에서 제주도산을 고른다. 토질이 달라서 더 아삭거리는 맛이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돼지감자를 구입한다. 식후에 차로 낼 재료다. 맛의 궁합을 맞춰보기 위해 재료를 사서 다양한 요리를 시도해 본다. 거기서 합격한 메뉴만 손님 테이블에 오른다. "경동시장이 최고인 거 같아요. 딴 데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가 여기엔 있거든요." 오늘 산 싱싱한 재료로 만드는 모던 한식. 강민구 셰프의 단골인 경동시장. 맛의 근간이 여기에 있다.
요리사에게 실력 이상으로 중요한 게 재료다. 그래서 요리의 출발점은 시장에 있다고 한다. 금수강산의 속살에서 나온 재료들. 경동시장에서 만나는 나물, 과일, 버섯, 약초들. 발품을 판 만큼 훌륭한 요리가 나온다. 자연을 닮은 재료들이 숨을 쉬는 경동시장은 서울 재래시장 탐사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다.
제수용품을 파는 가게. 한복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예쁘장한 한과를 쥐여준다. 세대를 초월한 주전부리일까. 맛나게 먹는 어린 손녀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짓는 할머니. 그 기운이 시장 전체로 퍼진다. 수확의 계절을 알리는 곡성 햇토란, 공주 밤, 경산 대추, 문경 오미자, 서산 송고버섯 등이 보인다. 추석 준비가 시작이다.
지나치게 무더운 여름 탓에 과일들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 품귀 현상이 일어 원가가 오르면 상인들의 고민도 커진다. 재래시장은 단순히 장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햇거가 나와야 되는데, 추석이 빨라서…."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전화기에 대고 말을 쏟아낸다. 차례상을 풍성하게 만들 좋은 물건을 전국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오후 다섯 시. 과일가게 총각이 목청을 높인다. "무화과가 한 박스에 오천원! 공짜요, 공짜!" 떨이를 친다. "자, 사천 원, 오천 원, 강원도 게 제일 좋아요." 마치 후렴구 같다. 리듬감이 살아난다. 노래로 흥을 돋우듯, 신바람이 난다. 물건을 다 판 시골 할머니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긴다. 경동시장에서는 우리네 여인들의 삶을 담은 수십억 개의 보따리가 풀렸을 것이다. 억척같은 생활의 체취가 묻어난다. 오늘 저녁에는 시장에서 산 국화차를 끓여서 마셔야겠다. 따뜻한 물에 퍼지면 가을 향내를 풍길 테니.
1 청정나물집 곡성 토란, 순천 고들빼기, 밀양 방풍, 김천 와송, 음성 표고, 양평 돌미나리, 용문 산초, 대부도 함초, 제주도 양해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올라오는 나물들이 넉넉하게 구비돼 있다. 어머니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남매가 대를 이어서 장사를 한 게 어언 40년. 어머니 때부터 거래해 온 할머니들이 아직도 기차에 나물 보따리를 싣고 와서 풀어놓는다. 이런 산채들, 특수 야채들이 청정나물집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나물 맛으로 충분히 미각을 되찾게 해주는 집이다. (02)967-4051
2 제성상회 30년 전 아버지가 문을 열고, 지금은 아들 형제가 이어받아 운영한다. 동생 정종국 사장은 가위로 밤 껍질 까는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 TV에 출연했던 '생활의 달인'이다. 가게 입구에 서서 손님들과 흥정하고 파는 건 동생 몫. 장사는 밤 까는 실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포 종류는 있으세요?" 호두를 산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여쭤본다. 물건이 좋아야 하는 건 장사의 기본. 말이나 행동거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오랜 노하우다. 각 지방 중간상들과 오랜 거래를 통해 양질의 상품을 구입한다. 공주 밤, 경산 대추, 온갖 제수용품이 간판 상품. (02)966-3732
3 선교한의원 한의원이라는 상호답게 가게 안쪽에 약장이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약초들. 칡, 둥굴레, 맥문동, 작약, 감초, 아마씨, 돼지감자, 민들레뿌리, 두충, 울금, 백하수오 등등 500가지 정도 구비돼 있다. 돈이 많이 들어가도 좋은 물건은 사둬야 하는 법. 올해는 구기자를 잔뜩 사다 뒀는데, 매스컴에서 구기자 예찬을 해준 덕에 '화끈하게' 나갔다고. 남성들은 양기에 좋은 복분자, 오미자, 구기자, 토사자, 사상자를, 여성들은 기를 보하는 당귀, 작약, 천궁, 황기 등이 베스트 아이템이다. 장미, 국화, 금잔화, 페퍼민트차 등을 사다 마시는 것도 좋다. (02)966-4325
4 과일가게골목 사과, 배, 감 같은 제철 과일은 널렸다. 만복상회(02-963-7817)와 우리상회(02-962-1417)는 몇몇 과일만 전문으로 취급한다. 가을엔 무화과, 오미자, 아로니아, 산머루 등을 내놓는다. 토종 참다래도 보인다. "참다래 같은 건 돈이 안 돼요. 그래도 시장이니 구색을 갖춰야죠." 가을이 깊으면 석류, 모과, 유자가 나온다. 냉장 보관해둔 과일로 긴 겨울을 나면 산딸기와 오디가 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