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철 스포츠부 차장

롯데와 삼성이 7차전 혈투를 벌인 1984년 한국시리즈는 프로야구 올드팬들의 뇌리에 여전히 선명하다. 32년 전 그날 팬들은 야구라는 드라마가 쓸 수 있는 모든 극적인 요소를 다 봤다.

당시 한국시리즈에선 전·후기 우승팀이 맞붙었다. 이미 전기에 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비교적 손쉬운 상대라고 생각한 롯데의 후기 우승을 측면 지원했다. 많은 사람이 삼성의 '밀어주기 작전'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승부 예상에선 롯데를 응원하기보다 삼성의 승리를 점쳤다. 당시 삼성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다.

우승 경쟁자라기보다는 들러리 취급받던 롯데는 예상된 열세를 뒤집고 7차전 승부 끝에 극적으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에이스 최동원은 '쌩쌩' 소리 나도록 '무쇠팔'을 쉴 틈 없이 휘둘러대며 5경기에 마운드에 올라 혼자 4승을 책임졌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시리즈 MVP를 차지한 주인공은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친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 한 방으로 승부를 가른 유두열이었다. 유두열은 그 시리즈에서 1할대 타격에 허덕이다 단 한 번의 스윙으로 구도(球都) 부산에 프로야구 첫 우승을 안겼다. 그는 MVP에 선정되고 나서 "최동원 때문에 내가 MVP가 됐다"며 공을 동료에게 돌렸다.

'굵고 짧게' 선수 생활을 마치고 정치나 방송계에 몸담기도 했던 최동원과 달리 그는 1991년 현역 은퇴 후에도 오로지 야구 외길 인생을 걸었다. 프로야구 지도자를 거쳐 제주·김해·속초·안양·포항·청주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교 팀 꿈나무를 키웠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지만, 속은 한없이 다정다감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올해 4월 5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2016시즌 개막전에서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섰다. 몇 해 전 신장암 진단을 받은 그는 앞서 암과 싸웠던 최동원·장효조가 그랬듯 투병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타고난 승부사들에겐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내 몸 안의 보이지 않은 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호쾌하게 스윙하던 전성기 모습을 뒤로하고 백발의 노쇠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현역 시절 달았던 33번 유니폼을 입고 팬들 앞에서 소리쳤다.

"전 롯데 자이언츠 야구 선수 유두열입니다!"

은퇴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그의 마음은 영원한 현역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유니폼을 벗고 나서도 늘 자신이 롯데의 첫 우승을 일궈낸 주역임을 자랑스러워했고, 롯데의 성적이 밑바닥을 헤맬 땐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고 한다.

지난 1일 영면에 든 그가 생전에 보여준 소속팀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 애정이 '천연기념물'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곳을 이해관계에 따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심지어 비난을 일삼는 일이 허다한 요즘 같은 '황금만능주의' '물질 우선의 시대'에 그의 빈자리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