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이 새 책을 펴냈다. 매일 아침 만나는 청취자들을 위해 직접 적은 글들을 엮은 것. 그가 오늘을, 자신을,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네 길고양이는 꼭 생선을 굽지 않아도 환풍기 소리만 들리면 어슬렁어슬렁 부엌 창문 근처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먹을 게 간절했으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오겠어요. 그 길고양이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면, 몹시 배가 고파 보이는데 하도 도도하고 꼿꼿해서 전혀 구걸하는 걸로 보이질 않아요. 저는 그걸 ‘자존심’으로 생각할 뻔했어요.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어요. ‘생명’이었습니다. 배가 불룩한 게 새끼를 가졌더군요. 그 도도함이 생명의 잉태에 대한 어미 고양이의 강한 의지로 느껴졌습니다. 고양이가 창문 앞에 다가와서 디딘 자리에는 바위에도 자국이 새겨질 것 같은 삶의 발자국이 남았습니다.”

김창완의 새 책 에 실린 첫 번째 글이다. 그는 16년째 진행 중인 라디오 의 오프닝 멘트를 매일 직접 쓰고 있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제작진들은 매일 아침 그가 큼지막한 글씨로 백지에 적어 건넨 글들을 16년 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그리고 우연히 그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13년간 팬으로 지낸 출판사 편집자가 이를 책으로 엮자고 졸랐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은 속독으로 단숨에 읽어버려서는 안 되는 책이다. 매일 저녁 머리맡에 둔 채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한 편씩 선물하면 좋을 글들이다. 하나 읽고, 책을 덮고 음미하며 내 안에 다지는 시간. 그의 글로 잠을 깨우고 그의 글로 감각을 깨울 수 있다면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될 것만 같다.

김창완은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하고, 방송을 진행하고, 연기를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에게서 배어나는 진솔함과 통찰력,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 그 비밀에 다가가고 싶었다. 책을 읽으며 무언가 알게 된 것도 같았다. 그렇게 약간의 자만을 품고 그를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쓰는지,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김창완이라는 사람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라디오 오프닝을 위해 쓴 글들이라고요.

활자화가 돼서 책으로 나왔으니 할 말은 없지만 사실은 적어서 버리는 글들이었어요. 그날그날 마이크 앞에서 나를 떠나는 말이지만, 이 말이 누군가에게 가서 나비가 되고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 거죠. 그런데 제작진이 그 글들을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다 모아놨더라고요. 또 어떤 사람은 그걸 다 다시 읽어보고 제목을 붙이고…. 그렇게 해서 책으로 만든 거예요. 사실 난 책 나오고서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어요.(웃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곧잘 시키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인상적이었어요. “아이고 주인공님 일어나셨네”라면서 계속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부르거나 세수하다 말고 거울을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묻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글도 있나? 덜떨어지는 얘기 많네.(웃음)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거예요.

하루를 살아가는 데 단 한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어제의 기억’을 갖겠다고 했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어째서 그렇게 소중한가요?

그건 중요한 얘기예요. 어제의 기억은 오늘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사람들이 오늘을 잘 살아야 하는데, 오늘을 내일의 준비로 생각해요.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죠. 어제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오늘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으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더 나은 내일과 더 나은 내 모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게 아니고, 오늘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쌓고 또 어제의 기억을 오늘로 가져와서 쌓다 보면 아름다운 시간이 축적되고, 그래서 결국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는 거죠.

책을 읽으며 김창완은 감각을 깨우는 사람, 혹은 감각이 늘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건 저절로 되는 건가요? 아니면 노력을 해서 되는 건가요? 아주 순수한 감각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훈련을 해야 하는 일이에요. 의식을 거쳐 세상을 해석하려 하면 그 안에 오류도 많아지고, 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는 데 장애도 있어요. 우리는 늘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에고(자아) 안에 살잖아요. 나는 의 기자, 누구누구의 딸, 혜진 씨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여러 좌표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위치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자기 존재가 있을 거라고요. ‘나는 누구다’라는 대답에서 출발해서는 아무 데에도 이를 수가 없어요. 그것을 벗어내고 걷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이 열리는 거죠. 눈도 뜨기 전에, 자기의 의식이 자기를 알아채기도 전에 나의 존재를 오롯이 느껴본다는 것. 아침과 나누는 첫인사로서 좋지 않아요? 그러면 모든 게 다 다르게 보일 거예요.

글에서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곧잘 “참 착하다”, “참 예쁘다”고 하세요. 그 부분을 읽고 있으면 따뜻한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듯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다행히 혜진 씨가 드라마를 많이 안 보네요. 나 진짜 악역 전문 배우거든요. 그 악당질 하는 걸 안 봤으니까 내 목소리가 따뜻하게 들리는 것 같다고 하죠. 극 속에서 내가 악당 짓 하는 걸 많이 본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너무너무 가증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좋은 말 하면 ‘저 사람이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닌데’ 그러죠. 그러니까 금세 알았죠. 내가 나온 드라마를 안 봤구나.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냐. 내 목소리를 착한 목소리로 알고 있으니.(웃음)

“번거로우시겠지만 한번 따라 해보실래요. (중략) 마음속에 동그라미 두 개 그리는 거예요. 하나는 커다란 원, 하나는 깨알만큼 작은 원. 커다란 원에는 고운 마음, 기쁜 마음이라고 쓰고 깨알만큼 작은 원에는 원망, 불안, 초조, 못된 마음이라고 쓰세요. 어때요.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으세요?”
― 김창완의 중 ‘착한 그림’

악역을 연기하는 게 괴롭거나 힘들지는 않나요?

너무 좋아요. 편하게 해요.(웃음) 어떤 사람은 그래요. 내가 솔직하기 때문에 나쁜 역을 할 수 있는 거라고요. 꾸며서 나쁜 걸 하려면 연기를 그렇게 못 할 거예요. 그런데 나는 거침없이 나쁜 놈이 되니까.(웃음)

연기한 것을 나중에 모니터도 하고 다음번엔 이렇게 해봐야지 다짐하기도 하나요?
전혀. 한 번도 안 봤어요.

어떤 사람은 그래요. 내가 솔직하기 때문에 나쁜 역을 할 수 있는 거라고요.

연기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가요?

욕심 있죠. 연기는 그 인물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내가 그 인물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죠. 모니터를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 같은 걸 보면서 개선하고, 그렇게 연역적인 작업을 거쳐 보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 인물이 되려면 나의 상상력이 중요한 건데 그건 외부로 드러나는 게 아니거든요. 소위 내면의 연기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거죠. 좋은 연기를 하는 것과 좋은 음악을 만나는 것은 정말 흡사해요. 어떤 곡이 좋은 곡인지는 몰라요. 또 어떤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좋은 곡과 좋은 연기가 있게 마련 아니에요? 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연기가 되면 좋은 연기일 것이고, 공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면 그건 보편성이 없는 연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죠.

음악, 연기, 방송 진행,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하니 천재라는 말이 따라옵니다.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짜 기막힌 분들에 대한 전기를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저는 피아니스트 중에 글렌 굴드를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 긴 악보의 콩나물 대가리가 머리에 다 들어가요. 정말 말도 안 돼요. 또 수학자 칸토어, 그런 엄청난 사람들이 진짜 천재죠. 그런 사람들한테는 정말로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77년에 산울림으로 데뷔한 이후 계속해서 음악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재능 때문이었을까요, 성실함 때문이었을까요?

뭐라 그래야 될까. (한참을 생각하다 낮게 읊조린다.) 재능? 성실? 그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어요. 재능이 엿보이는 곡들이 있고, 성실이 엿보이는 곡들이 있죠. 그런데 성실만으로 질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너의 의미’ 같은 곡들을 생각하면 재능 이외에 다른 걸로 설명하기가 어렵거든요. 나는 어떻게 해서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거의 미친놈같이 만든 노래들이거든. 생각을 해보면 지금까지 계속해온 비결에 대해 재능이나 성실함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늘 호기심과 감사함을 갖고 있어서라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음악을 공부했으니 내가 만든 건 음악일 거야’라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있죠. 노래를 만들어놓고 이게 노래일까 아닐까를 늘 생각한다고도 하셨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리나요.

그건 늘 내 삶을 다시 일깨우는,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 질문이에요. 나는 지금 진짜 내 삶을 살고 있나? 나는 내 인생의 전문가인가? 지금 마시는 주스도 이게 주스 맞나? 주스라고 남들이 그러는  거를 내가 마시는 거 아닌가? 노래를 만들어서 귀에 들리고 멜로디가 있으면 이건 노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건가. 이런 회의주의는 내가 사물을 보고 나의 시선을 교정하는 스크린이고 조리개예요. 오랫동안 내가 세상을 보는 방편이자 내가 내 인생을 미조정하는 조정나사였죠. 심지어 1978년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번도 안 쉬고 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에 대해서도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해요. ‘오늘 이 방송은 살아 있는 방송인가?’라고요. 중요한 태도예요.

라디오 오프닝을 위해 매일 아침 김창완이 적은 글들을 라디오 제작진들이 16년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정말 회의가 느껴지고, 아니다 싶을 때도 있죠?

물론이죠. 특히 요즘 ‘아 이건 술자리가 아닌데’ 그러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술이 있고 마시고, 사람들이 깔깔거리니까 틀림없이 술자리이긴 하지만 그 예전 청춘에 마시던, 이 허파가 바깥에 나와 있는 것 같은 후련한 술자리 같은 걸 왜 못 갖나.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나. 그런 것들. ‘이게 술자리가 맞아?’라는 게 요즘 제일 많이 드는 생각 중 하나예요.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그 글이 가사가 됐든 시가 됐든 에세이가 됐든, 자꾸만 완성된 글로 적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쉬울 것 같은데 계속해서 자유롭게 쓰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왜냐면 목적 글을 잘 못 써요. 프랑수아즈 사강도 그랬어요. 자기는 어떤 걸 쓰려고 쓰지 않는다. 일단 글을 시작한다. 그게 굉장히 좋아요. 온갖 자료를 완비해놓고 쓰는 작가도 있고, 먼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는 후자예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이 완성되어가는 것. 인터뷰 같은 경우도 어떤 식으로 되길 바라고 그런 거 없어요.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좋은 음악을 만들었지만, 또 다음에도 계속해서 걸작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으신가요?
음…. 아…. 그런 욕심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 욕심이 좋은 작품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일단 음악의 탄생이라는 게 아주 우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음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만든다? 만들고 싶나? 계속 기다리고 있나?

그런 욕심이 들면 노래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은 마음과 충돌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쪽과 어떤 식으로든 좋은 곡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그야말로 충돌하는데 내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모르겠네. 지금 딱 드는 생각은 내가 예전에 만든 '무지개'라는 노래가 있어요. 만들어놓고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는데, 요번에 우연히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 부르게 됐어요. 예전에는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못생긴 노래라고 치부하고 그랬는데 지금 다시 해보니까 좋은 거예요. 나름 순진하기도 하고, 순수 같은 게 있더라고요. 제가 생방송 중에 기타를 잡고 있거든요. 오늘도 계속 곡 나갈 때마다 그것만 하고 있었어요. 자기 노래를 계속하는 거 별로 재밌는 일도 아니거든요. 청중이 돼서 듣는 것처럼 감동적인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걸 계속 부르는 거예요. 나도 그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는데, 동물들이 동물원에 오래 갇혀 있으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서요. 그건가? (좌중 웃음) 그거 병이래요. 그 병인가?(웃음)

음악을 듣고 글을 읽으며 자유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모든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드네요. 원래는 그 자유로움의 비결이 궁금했는데 말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에 대한 개념이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보통 높이 날아가는 새를 보고 자유롭다고 하잖아요.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사실 새가 날아가고 있는 상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어요. 날갯짓이 없는 순간 곤두박질치잖아요. 또 새들이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꼭 잡고 있는 걸 보면 그 모습에서 굉장한 텐션이 느껴진다고요. 그래서 새 말고 다른 동물들을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발조차도 없는 동물이 있지! 이야, 진짜 지구에 살면서 저 아이디어만큼 지혜로운 건 없다!’ 발이 없으니 떨어질 일도 자빠질 일도 없어요. 비록 날 수는 없지만 들판을 기어가도 되고 땅속도 상관없고 나뭇가지도 올라갈 수 있는 거예요. 뱀이죠. 왜 뱀이 지혜의 상징이 됐을까요. 뱀은 중력에 완전히 적응한 동물 아니에요? 다른 애들은 섣불리 중력에 저항해요, 그게 자유인 줄 알고. 어리석게 날기까지 하는 놈도 있잖아요. 떨어지면 죽는 것밖에 없는데. 그거 진짜 무식한 짓이지. 사람은 그 사이에 있어요. 네 발에서 두 발을 떼었어요. 그런데 뱀만큼 지혜롭지는 못하죠. 가만히, 그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애가 어디 있어요. 우리는 심지어 누워서도 뒤척거리는데, 걔는 기가 막혀요. 자유를 위해 필요한 건 날개가 아니라 발조차 없음일 거예요.

자녀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은 부모가 진로를 정해주고, 매니저처럼 아이의 공부 계획을 세워주는 경우도 많은데요.

‘결단코 생각을 멈추어라.’ 인도 철학자 라즈니쉬의 책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한 줄이에요. 잘난 부모든 못난 부모든, 애들한테서 떨어지고 애들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야 해요. 저는 진짜 그러고 싶었고, 그러고 있어요. 제 경우 청춘 때부터 가장 내 안에서 녹여내기 힘든 문제가 바로 나와 집단이었어요. 나와 집단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지금까지도 그래요. 부모와 아이의 유대관계가 나와 나의 유대관계를 닮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유아독존적인 자식이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전체라는 맥락에서 부모는 전체에 속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수와 나라는 관계 속에 개인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가 늘 갈등이고 모순이에요. 또 그 관계라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방편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부모가 아이의 고유한 부분에 관여를 하면 스스로 학습해야 하는 나와 집단과의 관계에 교란이 일어난다고요. 자식의 세계에 있는 다수, 또는 집단을 대표하는 자로서 옆에 있어줘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자식이 뭘 학습할 수 없게 하는 게 지금 많은 부모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실수죠.

부모님께서 그렇게 온전한 개인일 수 있도록 키워주셨나요?

우리 부모님은 나를 너무나 일찍 세상에 던져버린 것 같아요.(웃음) 내가 스스로를 찾는 데 헤맬 정도로. 그런데 그 덕분에 집단 안에서의 나를 발견하는 훈련을 했어요. 참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부모들의 교육방식은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수영을 안 배워서 그런 것 같아요. 물에 풍덩 던지면 헤엄치는 방법도 배우고 물에 대한 공포도 없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다수 속에 들어가서 적응을 하고 거기서 자기를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물과 나의 관계를 알 텐데, 지금은 강보에 쌓인 아이로 키우다 보니 아이들이 익숙한 인생에서 헤엄쳐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어색해하는 것 같아요.

“실뜨기 아시죠. 친구와 마주 앉아 손에 감긴 실로 얼기설기 모양을 만듭니다. 실이 풀어지지 않게 잘 떠야 합니다. 길게 풀어져 버리면 놀이가 끝납니다. 그 시시한 놀이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그래요. 너무 사랑할 일도 아닙니다. 너무 미워할 일도 아닙니다. 그저 실뜨기하듯 마주 보고 살 일입니다.”
― 김창완의 중 ‘실뜨기’

책의 마지막 글이 노란 리본입니다. 마음의 빚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죠. 그리고 그건 어떻게 보면 치유의 장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마지막에 책을 덮는 여러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고. 그렇죠.

화나는 일이 있을 땐 어떻게 푸세요?

악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해소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나는 회피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난관, 불행, 괴로운 마음, 미움, 이런 것들을 공격적으로 직접 대면하는 스타일이죠. 그 대면한다는 것은 내게는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거예요. 그 사태나 상태로부터 눈 감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그 상태를 직시하면서 아플 때는 다 아파해요. 그러면서 간절히 시간이 가길 바라죠. 시간이 가면 된다고 믿고요. 그래서 제일 많이 쓰는 방법은 자는 거예요. 아픔을 잊기 위해 자는 건 아니고 다 아파하면서 자요. 다 미워하면서 자고.

나이 들고 있다고 느끼나요?
아니요. 그런데 저는 공연을 계속 하잖아요. 공연 사진을 나중에 누가 보내줘서 얼핏 보면, 하아. 진짜 두 달 전 사진도 젊어 보여요. (좌중 웃음) '어머나 이때만 해도 젊었네' 그런다니까요. 사진이란 단 며칠이라도 젊었을 때의 모습을 담기 때문에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정년퇴직한 친구를 만났어요. 여러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그 친구는 나한테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말할 사람조차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쓸쓸할까요? 청춘들은 '나 힘들어요'라고 말이라도 하는데 그 말을 할 수 없는 나이 든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앞으로의 삶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이런 하루하루의 삶에 경탄하는 것, 그게 늘 바라는 거예요. 어머나, 놀라워라. 오늘 오후에 황 기자를 만나서 인생 깊숙한 이야기를 다 나누고 진짜 놀랍네. 그게 다예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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