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여러 이본(異本)을 대조하여 최초 모습을 되살린 '정본(定本) 백범일지'(돌베개)가 출간됐다.
김구 선생 탄생 140주년(29일)을 앞두고 나온 이 책은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가 백범의 친필 원본 '백범일지'를 탈초(脫草)한 뒤 이를 등사본·필사본·간행본과 교감(校勘)하여 빠진 부분은 집어넣고, 오자·탈자 등으로 인한 오독(誤讀)을 바로잡았으며, 백범이 잘못 기억한 부분은 주석을 통해 밝혔다.
'백범일지'는 3·1운동 직후 중국에 망명한 백범이 고국에 있는 두 아들(김인·김신)에게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알려주기 위해 썼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1928~29년 앞부분(상권)이 집필됐고, 임시정부가 중경에 자리 잡은 뒤인 1941~42년 뒷부분(하권)이 완성됐다. 앞부분을 쓴 직후 최측근이던 엄항섭이 등사하여 미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고 이것이 미국 컬럼비아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백범일지'는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한 뒤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뒷부분까지 묶어 처음 출간됐다. 그리고 1948년 초 백범 측근이 '백범일지' 친필 원본을 필사한 것이 전해진다. 여러 종의 '백범일지'는 등사·간행·필사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와 변형으로 차이 나는 부분이 꽤 있다.
'백범일지'는 1994년 백범 아들인 김신 장군이 친필 원본을 공개했다. 백범은 친필 원본이 완성된 뒤에도 여러 차례 가필·수정했다. 도진순 교수는 친필 원본이 수정되기 전 모습이 있는 등사본과 필사본을 원본과 꼼꼼히 대조해서 원래의 '백범일지'를 복원했다. 결혼, 동학 활동, 일본인 쓰치다를 죽여 백범을 유명 인물로 만든 치하포 사건의 연도와 날짜 등 기본 사실부터 바로잡았다.
백범일지 친필 원본에서 가장 많이 삭제된 것은 안중근 의사의 막냇동생 안공근과 관련된 부분이다. 안공근은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당시 한인애국단 단장으로 백범의 측근이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무렵부터 김구와 관계가 악화됐고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도 교수는 "내용이 워낙 민감해서 백범이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11년 안악 사건으로 투옥될 당시 백범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백범일지 친필 원본은 일제의 고문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겨냈다고 설명했는데 그 부분이 먹으로 지워졌다. 이는 백범이 그 뒤에 기독교 신앙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때 백범은 서대문감옥에서 이승만이 앞서 투옥됐을 때 읽었던 책들을 보고 "배알(拜謁)치 못한 이 박사의 얼골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無限)의 늣낌이 이섯다"고 뒷장에 따로 적었다.
하권은 집필 당시 중국 동북 지역의 상황을 소개하면서 "김일성(金一聲) 등 무장부대가… 현상을 유지하는 정세"라고 서술했다. 도 교수는 이것이 북한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언급이며 백범의 이런 주목이 1948년 남북 합작 추진의 배경이 됐다고 본다.
백범일지 친필 원본은 시골 상민(常民)들의 일상생활어와 한글·한문·일본어가 뒤섞이던 개항기 언어의 격랑이 담겨 있다. '날살인(아주 죄질이 나쁜 살인)' '어이(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부르는 말)' 등 당시 방언과 옛말을 알아야 문맥이 제대로 이해된다.
도진순 교수는 "백범일지의 집필부터 수정·삭제·추가를 추적하는 것은 백범의 뇌를 시기별 단층 사진으로 찍어 변화 과정을 보는 것과 같다"며 "글자 하나의 수정이나 보완이 백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