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면적 13만8135㎡(약 4만1800평), 소장 유물 39만점, 50개 전시실에 달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350만명 관람객이 찾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박물관이다. 지하철 이촌역에서 내리면 불볕더위와 맞설 필요 없이 박물관 입구와 연결된 무빙워크를 타면 된다. 상설전시관 입구의 문을 열면 3층 높이 천장이 탁 트인 으뜸홀로 들어서는데, 정면으로 쭉 뻗은 중앙로비는 어떤 문(門)으로 들어가도 원하는 역사와 조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역사의 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1층 선사·고대관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면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를 섭렵할 수 있다. 시대별로 관람하되 꼭 봐야 할 유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포인트.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던 사실이 의외로 많아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사·고대관
선사·고대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다. 날카로운 돌 정도에 불과한 구석기 주먹도끼와 달리 빗살무늬토기는 인간만의 예술적 기교(奇巧)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라서다. 김은희 전시해설사는 "토기에 그려진 점과 선은 삶의 터전인 자연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부여·삼한관의 붓·목간·삭도도 재미있다. 연필·종이·지우개의 삼한시대 버전이다. 나뭇조각인 목간과 죽간은 종이 역할을, 붓으로 글을 쓰다가 실수가 생기면 이를 깎아내던 삭도는 지우개 역할을 했다. 해설사가 "옛날 친구들은 공책 대신 나무판에 숙제를 했다"고 하자, 설명을 듣던 이지민(8)양이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집에 종이랑 연필 많은데 선물해주고 싶어요."
선사·고대관에서는 여름에 어울리는 '무덤 체험'도 할 수 있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의 모습이 생생한 강서대묘 모사도 전시실은 고구려 벽화 무덤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평안남도의 강서대묘는 훼손이 심해 흔적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모사(模寫)한 이 그림들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내세관과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경주에서 발굴된 금령총과 황남대총 속 부장품은 당대 제례 문화를 보여준다. 주인과 하인을 형상화한 두 점의 금령총 말탄사람 토기는 사람·동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토기(像形土器)로, 제사 때 망자의 혼을 달래려 정수(淨水)를 담았던 주전자다. 50㎡(약 15평) 규모 어둑한 공간에 홀로 핀조명을 맞으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황남대총 금관·금허리띠는 1층 전시관 가운데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유물. 김 전시해설사는 "흔히 화려함에 매혹되지만, 장신구를 통해 권위를 세우려 했던 '왕권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555년 10월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시찰하고 세운 비석인데, '순수'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순수(巡狩)는 임금이 나라를 순찰했다는 뜻으로 한강(韓江)을 차지한 나라가 패권을 쥐었던 삼국시대 실정을 염두에 뒀을 때 순수비는 진흥왕이 이끈 신라가 그만큼 강성했다는 상징이다. 비석 자체보다 재밌는 건 오른편에 세로로 각인된 글씨다. 마모가 심한 이 비석을 해독한 이가 추사 김정희다. '이것은 신라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고 적혀 있다.
'역사의 길' 끝에 서 있는 13.5m 높이의 경천사 10층석탑은 한반도 수난사를 대표하는 슬픈 유물이다. 원나라 라마교 영향으로 외관이 화려하고, 탑 재료로는 드문 대리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 일체형처럼 보이지만 레고 블록처럼 조립식이다. 1907년 일본 특사로 조선 땅을 밟은 다나카 미스야키는 정원을 꾸미겠다며 이 석탑을 해체해 밀반출한다.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베델의 고발로 세상에 알려져 1918년 11월 반환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탓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 지하에서 해체된 조각으로 잠자고 있었다. 밀반출 과정에서 훼손도 심각해 1995년부터 10년간 복원 작업에 매달렸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재개관했을 때 이곳 실내로 자리하게 됐다. 3층에서 탑을 조감(鳥瞰)하면 아시아를 뜻하는 한자 '亞(버금 아)'가 보인다.
중·근세관
1762년 5월 13일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갔다. 영조는 손수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판목으로 못을 박고 동아줄로 묶었다. 뒤주에 세자를 가둬 죽인 걸 영조는 여생 동안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사도세자 묘지는 영조의 깊은 탄식과 변명이 적힌 묘지(墓誌·망자의 행적을 사기판이나 돌에 새긴 글)다. 손수 글을 지어 백자로 구워냈다. 영조는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라며 슬퍼하지만 "나쁜 무리와 어울려 국가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는 질책도 함께 남겼다.
대동여지도는 각종 지명을 비롯해 산줄기, 하천, 관방 등 다양한 지도 요소를 기호로 표현하여 판각 기법의 정수(精髓)를 보여준 대작(大作)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목판을 제작한 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국가 기밀누설죄로 감옥에 갇혀 옥사(獄死)했다고 전한다. 대량 생산을 위해 제작한 11개 목판도 불태워 없어졌다는 게 그들의 주장. 다행히 목판 일부가 남아있어 김정호를 폄하하려던 일제 의도를 밝혀낼 수 있었다. 나무판 앞·뒷면을 모두 조각해 11개 목판으로 50여장의 부분지도를 찍어 하나의 전도(全圖)를 완성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이 특징. 박물관에선 6개월마다 나무판을 교체해가며 전시 중이다.
1층 관람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책 앞에서 엄마와 함께 무얼 그린 그림인지 맞혀 보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2011년, 100여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다. 의궤란 국가 규모의 행사를 치른 후 준비·실행·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해둔 책으로,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과 단순 보관이 목적인 '분상용' 의궤로 나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의궤를 보관했던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의 방화로 소실됐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개 도서는 약탈당했다. 국보급 문화재이나 '대여' 형태로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미완의 환수로, 소유권이 없어 문화재로 등록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국력(國力)이 약하면 문화재 하나도 당당히 가져올 수 없는 국제사회 힘의 논리를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