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3시 NHK가 정규 방송을 중단했다. 아키히토(明仁·83) 일왕이 대국민 메시지를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전날 도쿄 도심 왕궁에 있는 고쇼(御所·개인 거처)에서 촬영한 동영상 메시지였다. 그는 "여든이 넘어 체력 면에서 제약을 느낄 때가 많다"며 "스스로의 행보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제 존재와 임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고 입을 열었다.
이후 10분간 그가 말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그는 "두 번의 외과 수술을 받고, 그에 더해 고령으로 인한 체력 저하를 느끼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섭정을 두거나 공무(公務)를 줄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일왕이 건강을 해치면 국민의 삶에 여러 영향을 미치고 (현 일왕이 별세하면) 국장 관련 행사가 1년간 계속된다"며 "그런 사태를 피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현행 왕실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삼가면서, 제가 개인으로서 생각해온 점을 말씀드리고자 한다"고 했다. 그가 이처럼 조심스러워한 이유는 일본 헌법이 '일왕은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어서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생 집요할 만큼 철저하게 '법대로' 행동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궁내청을 10년 이상 취재한 한 일본 기자는 "일왕이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사를 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또 "일본 헌법 아래서 일왕은 국정에 대한 권능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날 일왕은 상징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상징'이라는 단어를 여덟 차례 사용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지지하는 극우 정치단체 '일본회의'가 "일왕을 국가원수로 삼아야 한다"며 평화헌법 개헌을 주장하는 데 대해 간접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생전 퇴위 의사 표명이 아베에 대한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의 근대화를 연 메이지(明治) 일왕(1852~1912)의 증손자다. 그는 기존 일왕들과 다른 '첫 번째' 기록을 여럿 세웠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 왕족·귀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출범한 가쿠슈인(学習院)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근대적 교실에서 남들과 함께 배우며 자란 첫 일왕이다.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테니스를 하면서 만난 미치코(美智子·82) 왕비와 결혼해 왕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 왕비를 맞은 근대 첫 일왕이 됐다. 미치코 왕비는 닛신제분 창업자의 딸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선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부왕인 히로히토가 한평생 전쟁 책임론에 시달린 것과 달리 그는 2차 대전 때 초등학생이었다. 증조부 메이지 일왕부터 부왕까지 앞서 즉위한 세 일왕이 일본군 원수로 군림한 것과 달리, 일본 근·현대사에서 단 한 번도 군적(軍籍)을 가져본 적이 없는 유일한 일왕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전쟁에 대해 반성한다'는 입장을 굳게 지켜왔다. 1975년 왕세자 신분으로 2차 대전 때 민간인이 10만명 넘게 희생된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과격 단체 회원이 화염병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상흔을 돌아보겠다"는 담화로 되레 민심을 달랬다.
아키히토 일왕은 고종의 손자인 이구(1931~2005)씨와 유년 시절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학년은 다르지만 가쿠슈인에서 함께 배웠고, 왕실 모임에서도 자주 만났다. 궁내청 전문가들은 "일왕이 사석에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과 미안한 마음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며 "일왕이 '유럽도 가고 미국도 가는데 한국엔 못 간다'고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그는 2001년 기자회견 때 "50대 간무(桓武) 일왕의 생모(生母)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했고, 2013년 나라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도 같은 발언을 반복했다. 일본 우익은 그때마다 질색했다.
일왕의 해외 방문은 누굴 만나고 어떤 행사에 참석할지 세세한 부분까지 일본 정부가 정한다. 아키히토 일왕이 정부가 짠 스케줄에서 벗어나 자기 뜻대로 움직인 예외적인 사례는 2005년 사이판 방문 때 '태평양한국인평화탑'에 참배한 것이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