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로 가면 '미술관'이라 이름 붙인 곳이 많아졌지만 취미 수준의 그림 몇 점 붙여 놓은 카페가 대부분이다. 지난달 1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문을 연 미술관 '구 하우스'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곳은 예술 애호가인 구정순(64) 디자인포커스 대표가 40여년간 모아온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연 미술관이다.
이름 넉 자만 봐선 미술관이라 눈치채기 어렵다. 청회색 2층 벽돌 건물은 대로(大路)에서 한참 비켜 있어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거실문 같은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비로소 예술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노출 콘크리트로 내벽을 마감한 2층 집에 300여점의 현대미술과 디자인 작품이 걸려 있다.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게르하르트 리히터…. 하나도 쉽게 보기 어려운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이 여러 작가 틈에 빽빽이 들어 있는 걸 보면 예술 애호가들은 황홀해진다.
"보통의 미술관에선 혼날 분위기지요. 거기선 예술이 관람의 대상일 뿐 우리 삶과 함께한다는 느낌은 못 줘요. 그래서 편안한 집을 주제로 한 미술관을 만들었어요. 이것도 저희 집에서 쓰던 의자예요." 구 대표가 조지 나카시마 의자 위 화분 자국을 가리켰다. 조지 나카시마 의자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집에 둔 유일한 가구였다.
그러고 보니 전시실을 숫자로 매기는 대신 '서재' '거실' '침실' '다락'처럼 집 공간을 일컫는 단어로 부른다. '침실(Bedroom)'이라 이름 붙은 2층 방엔 앤디 워홀, 백남준의 작품이, '다락(Attic)'엔 막스 에른스트의 설치 작품이, '정원(Garden)'엔 필립 스탁의 의자가 놓여 있는 식이다. "의식주 중에 입고 먹는 수준은 상당히 올라왔는데 집을 꾸미고 사는 수준은 아직 모자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술과 함께하는 주(住)생활을 보여주자 생각했지요." 구 하우스, 즉 '구씨 집'이란 이름이 여기서 왔다.
구 대표는 '디자인포커스'라는 시각디자인 회사를 이끌어온 베테랑 디자이너다. 30여년간 KB 국민은행, 금성사, 국립중앙박물관, KBS 등 굵직한 CI(기업 이미지) 작업을 해왔다. 예술과 인연 맺은 건 40년 전. 1970년대 초반 첫 직장인 광고회사에 다니던 시절, 보너스 20만원을 들고 회사 근처 인사동 화랑에 갔다. 한 화랑에선 권옥연의 1호짜리 유화를, 옆 화랑에선 박수근의 4호짜리 드로잉을 팔았다. "한 달간 두 화랑을 오가며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박수근 드로잉을 샀어요. 그때의 떨림을 잊을 수가 없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간 모은 작품 수는 "안 세어 봐서 모를 정도"란다. "일부 나왔다"는 게 지금 전시된 300여점이다. "바이엘러 미술관을 만든 스위스 화상(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말했다지요. 예술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거라고. 소장의 완성은 여러 사람과 나누는 것이라 생각해요." 독신인 그는 "물려줄 사람도 없고 숨길 구석도 한 점 없기에, 사회에 환원하는 기분으로 미술관을 만들었다"며 웃었다. 개관식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 관람객들이 불편해한다"며 카메라 앞에도 서지 않았다.
설계는 건축가 조민석이 맡았다. 조민석은 201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건축전 때 한국관 커미셔너로 황금사자상을 탔다. 상업 건축을 주로 해왔던 그는 수상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미술관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구 대표는 "조용하고 튀지 않는 건물을 원해 승복(僧服)을 닮은 청회색 벽돌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작품 설치엔 소장가의 소심한 복수도 숨어 있다. "한 프랑스 조각가를 사석에서 봤는데 예술은 뒷전이고 너무 상업적이었어요. 그가 만든 쇠 탁자와 의자를 필리핀 작가의 '참회'를 주제로 한 회화 작품 앞에 뒀지요. 반성 좀 하라고. 하하." 힌트는 여기까지. 그가 누구인지는 미술관에 가서 직접 확인하시길. 문의 (031)774-7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