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을 떠나 서울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주한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를 보면 현재 덕수궁 북서쪽에 있던 선원전(옛 경기여고 자리)과 현 미국 대사 관저 사이의 작은 길이 '왕의 길(King's Road)'이라고 표시돼 있다. 당시 고종이 경복궁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동했던 피란 길로 추정된다.
올해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애환의 근대사 현장이 복원된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현재 탑만 남은 옛 러시아 공사관(사적 253호)을 내년부터 2021년까지 원형 복원하고 선원전 터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졌던 '고종의 길'을 내년 말까지 복원한다고 20일 밝혔다.
'아관(俄館)'이라 불렸던 옛 러시아 공사관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이 피신해 머물면서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했던 곳이다. 1890년(고종 27년)에 르네상스 양식의 벽돌 건물로 지어졌지만 6·25전쟁 때 대부분 파괴돼 현재는 탑 부분만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내년부터 고증 작업, 기본 설계 등 복원 정비 계획을 세우고 2021년까지 단계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공사관 건물, 지하 통로 및 지하 시설물까지 원형 복원한다. 예산은 약 60억8000만원.
'고종의 길' 복원은 9월 착공한다. 미국 대사 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터 사이에 경계벽 석축과 담장을 설치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길이 113m, 폭 3m 담장이 러시아 공사관 앞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예산은 약 25억원. 그동안 미 국무부 재외공관관리국(Bureau of Overseas Buildings Operation)이 현지 조사 등 네 차례 검토 과정을 거쳐 지난 6월 설계안을 최종 승인했고 이에 따라 복원 사업이 가능해졌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문화재청은 덕수궁의 중요한 전각이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해체, 철거된 선원전 영역도 복원한다. 역대 왕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했던 선원전, 서거한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셨던 빈전(殯殿)인 흥덕전, 신주를 임시 봉안했던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 건물, 배후 숲(상림원), 지형, 궁 담장 등의 원래 모습을 되살릴 계획이다. 2039년까지 약 560억원의 예산을 들여 3단계로 복원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