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풀어헤친 처녀 귀신이 한여름 밤 TV를 장악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시청자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그 귀신은 어느 순간 TV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자란 지금의 20~30대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공포를 즐기고 있다.
80~90년대, 안방극장 귀신들의 전성기
1980~90년대는 귀신을 소재로 한 공포 드라마와 예능의 전성기였다. 무더운 여름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TV의 공포물을 보는 것이 피서의 한 방법이었다. 휴가철에도 공포물의 시청률은 20%에 가까웠다. 당시 대표적인 공포물은 아직도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전설의 고향', '토요미스테리 극장', 'M' 등이 있다.
['전설의 고향'부터 'M'까지, 안방 떨게 만든 추억의 공포물]
한국 공포물의 전설 격인 '전설의 고향'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민간 설화 등을 소재로 제작된 공포 드라마다. 1977년~1989년까지 매주 방송되다가 1996년부터는 6~10월경에만 납량 특집으로 방송되었다. 한 맺힌 처녀 귀신 등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이 대거 등장했으며, 천 년 묵은 여우인 구미호와 '내 다리 내놔'라는 강렬한 대사를 남긴 외발 귀신이 아직까지 '전설의 고향'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1999년을 끝으로 한동안 제작되지 않던 '전설의 고향'은 제2의 전성기를 노리며 2008년, 근 10년 만에 다시 시청자에게 돌아온다. 한창 납량 특집물이 기근일 때라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정사신과 거북한 신음소리 때문에 '야동의 고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 관련 기사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방영된 '토요미스테리 극장'은 초자연 현상이나 불가사의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재연 프로그램이다. 특히 이승환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추적한 에피소드가 인기를 끌었으며, 이밖에도 심령사진, 혼령의 복수, 실종 사건 등 자극적인 소재가 단골로 등장했다. 이 때문에 꾸준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프로그램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시민단체의 항의에 못 이겨 종영했다.
1994년 8월 한 달간 납량 특집으로 방영됐던 'M'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드라마였다. '낙태'의 윤리성을 고발하는 소재도 그러하거니와, 각종 특수효과와 컴퓨터 그래픽(CG)을 동원한 공포 분위기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없던 것이었다. 'M' 시청률은 방송을 거듭하며 꾸준히 올라 종영날인 8월 30일에는 52.2%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한국 드라마 시청률의 20위에 해당한다. 초록색 눈을 하고 남자 목소리를 내는 심은하는 이 드라마로 톱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최고의 호러퀸', '귀신과 싸워 이길 여배우' 설문조사에서 1위에 선정됐다.
'M'의 성공은 전통적인 한국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악령과 탄탄한 시나리오를 접목한 공포 드라마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이후 '거미'(1995), 'RNA'(2000), '혼'(2009) 등 공포 드라마가 잇따라 등장했다. 그러나 'M' 만큼의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으며 표절, 선정성, 폭력성 논란 등 숱한 구설수에 시달렸다. 특히 '혼'은 10여 년 만에 부활한 납량특집 드라마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자체 최저 시청률을 기록하며 초라하게 종영하고 말았다.
TV 공포물, 왜 서서히 사라졌나
과거 공포물은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선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1997년, 미스테리한 사건을 다룬 프로그램 '이야기 속으로'와 '토요미스테리 극장'이 동시에 방영될 때는 자극적인 소재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다. 결국 '이야기 속으로'는 "시청자에게 충격과 불안감을 주며, 비과학적인 생활 태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방송위원회의 징계를 받기도 한다. ▶ 관련 기사
방송사에서 공포물 제작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제작비의 한계다. 실제로 사실적인 분장과 세트장, 특수 촬영 등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상 이상이다. 1999년 방영된 귀신 드라마 '고스트'는 제작비 20억 원이 들었으며, 2010년 작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총 40억 원의 제작비를 썼다. 이 중 미술 제작비만 14억 원이 투입됐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몇 날 밤을 새우며 야간 촬영을 하고, 피아노 줄에 매달리는 등 힘든 연기를 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심지어 귀신의 하얀 눈을 표현하기 위해 동전만 한 렌즈를 껴야 하기도 한다. 젊은 여배우들이 선뜻 귀신 연기에 나서지 않는 이유다.
TV 공포물이 흥행했던 80~90년대에 비해 시청자들의 눈이 부쩍 높아진 것도 한 이유다. 'M'의 다소 인위적인 CG에도 파격적이라 느꼈던 시청자들은, 이제 TV 드라마에서도 영화 못지 않은 퀄리티를 원하게 되었다. CG와 특수효과가 필수적인 공포물의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복수' '한(恨)'을 주요 정서로 하는 한국 공포 드라마의 특성 상 비슷한 줄거리가 반복된다는 한계도 있다.
2016년 여름, 새로운 형태의 공포가 찾아왔다
수많은 공포물이 자취를 감췄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공포'를 즐기고 있다. 다만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던 '납량특집'과 달리, 오늘날의 공포물은 계절과 상관없이 생산된다. '웹툰'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공포물도 등장했으며, 공포감을 주는 대상도 귀신에서 사람, 유령, 좀비, 뱀파이어 등으로 다양화됐다.
2010년 이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귀신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범죄를 바탕으로 한 스릴러물의 인기가 급격히 치솟은 것이다. 이런 바탕에는 잔혹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 등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이 등장하면서, 미신에 가까운 귀신 이야기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방영된 스릴러 드라마 중 주목받은 작품은 '마을'(SBS), '시그널'(tvN), '원티드'(SBS)다. 이들 드라마 세 편은 모두 범죄와 추리를 접목한 형식으로 한국 스릴러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단순히 범죄를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여러 명의 용의자를 등장시켜 시청자들에게 범인이 누군지 맞춰보라는 숙제를 던진다. 이 과정에서 곳곳에 숨어있는 반전 카드가 공포를 심어준다.
최근 몇 년간 스릴러물의 강세로 한국 드라마의 장르가 풍성해지고 있지만, 한계도 있다. 스릴러물 작가 정해연씨는 "미국의 추리·스릴러물은 범인들이 다양한 직업과 범죄 동기를 가진 반면, 한국의 스릴러물은 범인이 모조리 사이코패스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사건이 진행될수록 억지스러운 우연이 반복된다는 점도 한국의 스릴러 드라마가 가진 약점이다. ▶ 관련 기사
['스릴러'에 푹 빠진 대한민국, 안방-스크린 모두 '반전'만이 살길?]
범죄자에게 '호러퀸' 자리를 빼앗긴 귀신들은 일제히 '귀여움'을 무기로 들고 나오고 있다. 2010년, 신민아가 연기한 '구미호'가 그 시작이다. 이후 박보영('오 나의 귀신님', 2015), 김소현('싸우자 귀신아', 2016) 등이 귀여운 귀신으로 분했다. '섬뜩한 귀신'은 브라운관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친근한 매력을 가진 귀신과 그들의 로맨스가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TV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크린에서도 공포물은 최근 몇 년간 환영받지 못했다. '여고괴담'과 같은 공포영화가 스타 여배우들의 등용문이 되던 것도 모두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그렇다고 공포 영화가 아예 안 만들어졌던 건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퇴마', '경성학교', '손님', '검은손' 네 편의 공포 영화가 개봉했지만, 모두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행에 참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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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제임스 완 감독의 영화 '컨저링2'가 개봉 한 달여 만에 관객 190만 명을 돌파하며 공포영화의 부활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성적은 국내에서 개봉한 공포 장르의 외화 중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2013년 개봉했던 '컨저링' 1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컨저링'의 흥행 비결로 '무서운 장면 없는 무서운 영화'라는 이유가 꼽힌다는 것이다. 영화는 자극적인 시각 ·청각 효과에 의존하는 공포영화와 달리,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내 작품으로는 지난 5월 개봉한 영화 '곡성'과 개봉을 앞둔 '부산행'이 '공포'의 정서를 담았다. 두 영화 모두 귀신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호러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각각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과 좀비를 소재로 하여 귀신 이야기와는 또다른 공포감을 준다.
스마트폰과 웹툰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TV나 영화와는 또다른 느낌인 '스크롤 공포'를 즐기게 됐다. '공포 웹툰'을 통해서다. 제작비나 심의 규정 등에서 한계를 가진 TV의 공포물에 비춰볼 때, 앞으로 공포 웹툰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자신이 보고 싶을 때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점도 공포 웹툰이 가진 장점이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공포 웹툰은 2011년 여름 등장한 '옥수역 귀신'이다. 실제 존재하는 지물(地物)인 옥수역과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인 이 웹툰은, 처음 나왔을 당시 이틀간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 오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웹툰이 영화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스타 웹툰 작가 강풀의 '이웃사람'(2012)이 대표적. 같은 해 여름 나온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와 '연가시'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개봉 전 웹툰을 먼저 공개하는 홍보 방법을 썼다. ▶ 관련 기사
TV와 영화를 통해 공포를 즐기는 방식은 가장 대중적이긴 하지만 한계가 있다. 시각이나 청각, 스토리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연출자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화면이기도 하다. 이에 더 생생한 공포를 즐기려 흉가를 찾아가거나, 시각·청각·촉각 등 온몸의 감각으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공포 연극'은 2007년 무렵부터 대학로를 중심으로 대중화됐다. 당시 심야에 공연되던 '오래된 아이'와 '죽이는 이야기' 두 편은 8월 휴가철에도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어둠 중에 들리는 구둣발 소리, 신음소리, 으스스한 음향 효과는 조그만 소극장에서 더욱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여기에 객석에 직접 등장하는 처녀 귀신은 공포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다. ▶ 관련 기사
2016년 여름의 대학로에도 공포 연극이 대거 찾아왔다. 한 여고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부터, 4D 장치를 이용해 긴장감을 한치도 늦출 수 없는 작품까지, 스토리는 더 탄탄해지고 연출도 섬세해졌다. 4D 연극은 극중에서 피가 낭자한 장면이 나오면 어디선가 물이 뿌려지거나 귀신이 스크린에서 걸어나오는 공포를 경험할 수 있다.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포 연극도 있다. '전설의 고향'을 실사로 옮겨놓은 듯한 연극 '귀신의 집'은 놀이동산 있는 공포체험관을 연극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1년에 3~4번씩 버려진 정신병원, 학교, 폐공장 등의 '흉가(凶家)'를 찾는다는 회사원 박모씨는 "흉가체험은 공포영화보다 더 스릴이 넘친다"고 말한다. 그는 "한 정신병원을 찾았을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병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무서워서 발을 뗄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부터 마니아층이 즐기던 흉가체험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되었다. 특히 한국의 3대 흉가라고 알려진 'K정신병원', '제천 늘봄가든', '영덕 장사흉가' 등은 여름마다 체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관련 기사
1인 인터넷 방송이 활성화되면서, 흉가체험을 중계하는 방송도 화제가 되고 있다. 공포를 즐기고 싶은데 직접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BJ들은 직접 흉가를 방문하는 모습을 생중계하고 미션을 수행한다. 보통 자정부터 새벽까지 진행되는 방송에 수백, 수천명의 시청자가 참여하고 별풍선을 날린다. 그러나 '흉가'라고 알려진 곳의 인근 주민들은 이런 흉가체험객 때문에 소음 등의 피해를 호소하기도 한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동굴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여름마다 '야간공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손전등 하나만 들고 1800여 m의 동굴 속을 헤매다 보면 처녀 귀신, 저승사자, 강시 등의 귀신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정선군시설관리공단 측은 "지난해 메르스 때문에 한 해 쉰 탓에 올해는 공포체험이 더욱 강해졌다"며 노약자나 임산부의 참여 자제를 당부하고 있다.
20여 년 전 TV를 휘어잡던 그 귀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세월이 지나도 '여름=공포'라는 공식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실제로 '공포'라는 감정이 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서운 것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고 하는 건 혈관에 혈액의 공급이 줄어들고 근육이 수축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추위를 느낄 때의 반응과 같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더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포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