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말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고등학교. 여름방학을 앞두고 3학년 담임인 김혜선(가명·40)씨에게 한 학생이 찾아와 생활기록부에 자신이 준비해온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이력을 반영해달라고 했다. 세특은 과목담당 교사가 학생의 학업성취도와 관련된 평가를 작성하는 항목. 김 교사는 "(학생이 써낸) 활동 여부가 사실인지 확인 후 검토해보겠다"고 했지만, 학생은 "써준다는 약속을 받기 전까지 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김 교사는 "학종으로 교사의 권한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생활기록부 작성과 관련해 학생·학부모들 불평불만이 잦아 스트레스도 크다"며 "나쁜 내용이라도 한 줄 들어가면 '입시 망치려고 작정했느냐'는 비난을 들으니 '포장술의 달인'이 돼간다"며 씁쓸히 웃었다.
학생부종합전형, 일명 학종은 교사들의 업무량도 바꿔놨다. 생활기록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작성 권한이 교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평가방법도 정량평가(定量·객관적 수치에 의한 평가)에서 정성평가(定性·주관적 판단에 의한 평가) 위주로 전환돼 교사는 맡은 학생 전체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 생기부에 기재해야 한다. 공교육 교사가 입시교육의 중심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 이면에 교사가 담당하는 업무가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더 테이블'이 지난 6일부터 이틀간 서울 강남지역 고등학교 교사 174명을 설문한 결과 "학종 이후 교사 업무량이 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64명(94.3%)이 '그렇다'고 답했다. 또, '학종 이후 교직생활 만족도가 높아졌느냐'는 질문엔 92명(52.9%)이 '아니다', 37명(21.3%)이 '모르겠다'고 답했다. 교사 박세현(가명·45)씨는 "빡빡해진 내신고사 탓에 학생도 학교생활이 숨 막히지만, 학생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야 하는 교사들도 숨 막히긴 마찬가지"라고 털어놨다. 10년차 교사인 이두리(가명·35)씨는 학기말이면 대학 동기들과 작문(作文)의 고통을 토로한다. 컴퓨터공학과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인문학 책 몇 권만 읽어와도 '융합형 인재를 꿈꾼다'는 식으로 포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 재량이라고 하지만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들이 압박을 주는 경우가 있어요. 학교 입장에서도 대입 성과가 나야 하니 누구의 생활기록부를 열어봐도 칭찬 일색입니다. 종국엔 변별력 없어지는 제로섬 게임인데, 학생들마다 인생 스토리 만들어줘야 하니 교사들만 피곤한 거죠."
반면 교사의 평가에 대입 향방이 달린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교사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됐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지난해까지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를 통해 생활기록부를 상시 열람할 수 있었지만 교육부가 '학부모의 개입을 차단한다'는 취지로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 정성평가 항목에 대해 학부모의 학기중 열람권한을 없앴기 때문이다. 학년말 생활기록부 작성이 완료되면 수정할 기회가 없어 학생과 학부모는 학기가 끝날 때마다 담임교사나 행정실을 통해 자료를 요청하고, 문제제기할 내용이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학부모 김지영(45)씨는 "어떤 담임을 만나느냐에 따라 생활기록부 내용이 달라지니 '학종은 담임 운(運)에 달렸다'는 말이 나온다"며 "생활기록부가 어떻게 작성될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면 '담임복권 맞았다'고 자랑할 정도"라고 했다.
수시 원서 접수시 교사가 비공개로 제출하는 '대입추천서'도 논란이다. 민준호(55)씨는 딸의 원서접수를 앞두고 지인인 교사의 상담을 받다가 충격을 받았다. 교사 재량으로 추천서를 '비(非)추천서'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지인 교사는 인성이 나쁘다고 판단한 한 학생의 추천서에 '평판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적어 제출했다고 한다. 민씨는 "담임교사 코멘트 한줄에 3년간 쌓아온 학교생활이 무용지물 되는 것 아니냐"며 "혹여 말실수로 심기라도 건드릴까봐 더 노심초사하게 됐다"고 했다.
일선 교사들은 "고의로 생활기록부나 추천서를 나쁘게 쓰는 교사는 없다"고 말한다. 생활기록부는 결국 학교생활에 임하는 학생의 태도에 달렸다는 것이다. 오장원 단대부고 진로진학부장은 "교사에게 '생활기록부를 이렇게 작성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교권을 침해하면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같은 인성평가 항목에서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실하고 성의있는 학생들 생활기록부는 신경 써서 쓰기 마련입니다." 박기혁 세화고 교무부장은 "수업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기 존재감을 각인시키면 '세특'처럼 학업성취도를 보여주는 항목이 풍성해진다"며 "학년 말에 일괄 작성하던 생활기록부를 최근엔 수시로 기재하는 추세라 면담시간을 활용해 자신의 장점과 보완할 점에 대한 교사의 조언을 들으면 현재 생활기록부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종서 이투스 교육평가연구소장은 "학종이 목표한 공교육 강화가 교사의 영향력 확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교사가 적극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 관계를 형성하면 역효과가 난다"고 했다. 이예경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교사의 권리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면 신뢰감을 줘야 한다"면서도 "교사가 생활기록부에 할애하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학생과 학부모도 고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