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인문학'의 가벼움
지적 허영심 채우는 액세서리로 전락
지난 5월, 한 케이블 프로그램에 출연한 수능 사회탐구 스타 강사가 말 여러 마리가 달려가는 그림 한 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중섭의 '소'처럼 역동성이 살아 있다"면서 "이것이 진짜 조선화"라고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그림은 미술사 연구자 황정수씨에 의해 장승업 그림이 아니라 전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이 강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강사와 방송 제작진의 사과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이 최근 유행하는 인문학 강의 열풍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엉뚱한 작품을 장승업 것으로 소개한 오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인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단 강의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歷史보단 재미 위주 해석 논란
지난 6월 9일 같은 프로그램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던 스타 학원 강사의 사례도 있었다. "아들의 '고추'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 거예요. 아예 불구를 만든 거예요. 그 아이가 그다음 왕인 경종이에요." 이 강사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청중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사는 숙종의 빈이자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으면서 자기가 낳은 세자를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며, 장희빈이 당시 '너도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막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내 가슴에 피못 박을 거야? 내가 그런 일 없게 만들어 줄게'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방송을 본 전공자들은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TV 방송에 나갈 수 있느냐"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실록 등 공식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장희빈이 차마 할 수 없는 악담을 하고 손으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했다'는 내용이 노론 측 기록인 '농수수문록(農叟隨聞錄)'에 나오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원 강의식 '요점 정리' 인문학… 득일까, 독일까]
서점가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에 올라
서점가에서는 역사·사회·윤리 등 인문학의 내용을 학원 강의처럼 물 흐르듯 요점 정리한 책들이 인문학 분야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았다. '무지했던 것들에 대해 쉽게 알려주는 책'이란 찬사와 '깊게 읽어야 하는 인문학을 요점 정리로 뒤바꾼 반(反)인문학 책'이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한 책은 1·2부 합쳐 100만 부가 팔려 출판계의 불황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인스턴트 인문학'의 유행은 책 읽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보다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이나 전문가 강연에 기댄다는 것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예전 같으면 서너 시간 걸려 책 한 권을 읽고서 깨달았을 지식을 요즘 사람들은 책에 대한 2시간짜리 강의를 통해 단번에 습득하려 한다"고 했다. 결국 '독서력의 부재'가 원인. 한씨는 "책벌레들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또 다른 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모른다"면서 "책 관련 강의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추천도서 목록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문교양서를 주로 내는 한 출판인은 "개론 지식을 대중에게 단순한 프레임으로 전달하는 책들이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했다. 인문학에 대한 동경은 있으나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책을 접하고는 '어, 생각보다 쉽네!' 하면서 사들인다는 것이다.
깊이가 없는 배움, 입시용 · 취업용 수단
청소년기의 배움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도 가벼운 배움의 예는 흔하다. 대학 입시만을 목적으로 시험 점수로 경쟁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점수를 내기 위해 사교육까지 받으며 공부한다. 하지만 정작 깊은 배움보다는 성적을 내기 위해 그때그때 급하게 소화하고 지나쳐버리는 일시적 배움의 경향이 강하다.
특히,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과목당 한 달에 보통 3백∼5백만 원에 달하는 '족집게 과외'가 성행한다. '족집게 과외' 교사에는 전직 교사, 학원 강사, 대학원생 등은 물론 현직 교사까지 포함돼 주로 수능에 예상되는 문제의 유형을 짚어내고 그 풀이 방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교과서 없는 토론식 수업… 여가 시간에도 생산적 활동"]
["알파고 시대 넘을 힘은 책읽기… 토론·에세이까지 함께 하세요"]
국내 대기업에서 7년째 근무 중인 미국인 E씨는 최근 신입 사원을 부서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토익 점수 990점에 미국 대학에서 어학 연수를 한 경력도 있어 신입 사원으로 뽑았는데 정작 영어 발표 자료 준비를 시켰더니 "영어를 못 한다"고 한 것이다. 신입 사원은 "대학 다닐 때 토익 시험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스피킹은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홍콩과 태국 등에서도 근무했던 E씨는 "서류만 보고 한국 대졸 사원들의 영어 실력을 믿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한국 대학 졸업생들을 고용해 일해본 많은 외국인은 "한국 대졸 사원의 단점 중 하나는 영어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라고 답한다. 미국인 E씨는 "영어 시험 성적이 높아서 채용해 보면 정작 필요한 영문 보고서 작성이나 영어 발표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문법과 어휘력만 뛰어나고 실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홍콩 출신 J씨도 "한국 대졸자들이 홍콩·싱가포르 대학 출신과 비교해 실력 면에선 큰 차이가 없지만 유독 영어 능력에서 크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주한 캐나다 상공회의소장을 지낸 시몽 뷔로씨는 "한국 학생들이 대학에서 실용 영어보다는 학점 따기나 취업 대비 토익 점수 올리기 등 '시험 영어'만 공부하다 보니 실력을 키우기 어렵다"며 "한국 대졸자들이 말하는 '해외 경험'도 주로 미국에서 1년간 어학 연수 정도의 피상적 경험에 불과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상위 10개 대학들, 졸업생 평판도 평균 29.8위]
["취업하려면 스펙, 스토리, 끼에서 이젠 인문학까지…"]
짧고 쉽게 접하는 '스낵 컬처'
모바일 기기가 지식·정보 습득 방식을 바꾸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나 약속 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와 같은 자투리 시간에 부담 없이 즐기도록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한 콘텐츠가 늘어나는 것이다. 기존 콘텐츠보다 길이를 줄이고, 모바일 기기 이용자층에게 익숙한 요소를 콘텐츠에 집어넣기도 한다.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듯 가볍게 접하는 콘텐츠라는 의미에서 '스낵(snack·간식) 콘텐츠' 또는 '스낵 컬처(문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스낵 컬처는 핵심만 담은 간결함을 무기로 퍼지며, 항상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콘텐츠 소비 시간을 줄여주는 장점으로 큰 인기다. 그러나 스낵 컬처만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의 경우, 긴 글이나 책 읽기는 불편해하고 대부분 스낵 컬처만을 즐기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스낵 컬처만을 지속해서 접하는 경우, 사고 능력이 떨어지고 자극적인 콘텐츠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또한, 지식을 단편화시켜 그 외 또 다른 지식을 찾아보게 이끄는 힘이 없어, 지식의 본질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있다.
[과자 먹듯 가볍게… 드라마도 영화도 15분이면 다 본다]
가벼운 지식 생활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
토익 영어나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는 대신, 조선왕조실록이나 '논어'와 '맹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토론하는 서원 형식의 인문학 교육 과정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미 들어섰거나 들어설 예정인 '인문학 서원'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외 엘리트 교육 코스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이다. 당초 전문경영인(CEO)이나 관료 등 기성세대에 대한 '재교육'에 방점을 뒀던 인문학 강좌의 타깃이 20~30대 젊은이로 '하향 조정'되는 것도 특징이다. 아산서원(峨山書院)과 청년 아카데미는 30세 이하 대학생, 건명원(建明園)은 15~25세 학생을 각각 대상으로 인문학을 교육하고 있다. 건명원의 일원인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은퇴를 앞둔 CEO나 취직에 여념이 없는 대학생만 해도 늦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문학이 청소년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내에서는 학과 통폐합이나 폐과(廢科) 등 존폐 위기에 놓인 인문학이 서원이나 아카데미 같은 대학 외부 공간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은 "대학 내에서는 모든 가치의 중심이 취업이나 스펙 쌓기, 실용성에 맞춰지다 보니 인문학은 위축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면서 "서원의 문제의식도 대학이 '거리의 인문학' 같은 사회적 요구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토익 대신 논어(論語)… '21세기형' 서원이 뜬다]
[답 없는 고민…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돌아보다]
심리학·역사·철학까지…
학술대회 같은 열띤 토론하는 독서 모임
매주 도서관에서 모여 학술대회 같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독서 모임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고양시 아람누리도서관에서 지난 2008년 결성돼 활동해온 독서 토론 동아리 '화요일에 책향기' 창립 회원 최순덕씨는 "평소 읽기 힘들었던 철학 서적, 역사책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 보니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이 생겼다"며 "화향 활동 전에는 주로 소설을 읽었는데, 다양한 분야를 접하니 스스로 많이 성숙해진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오랜 회원 신은철씨는 "책 읽기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독서 토론을 통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다 보니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지면서 닫혀진 사고에서 열린 사고로 바뀌는 거 같다"며 "매주 발제자를 맡은 사람은 책을 3번 정도는 정독해야 토론을 이끌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깊이 있는 책 읽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놀이처럼 책 읽고 대화·토론… 삶의 지혜·애정 함께 자라요]
["알파고 시대 넘을 힘은 책읽기… 토론·에세이까지 함께 하세요"]
시험에 대비하듯 정답 위주로 '요점 정리'해서 내놓는 인문학 강좌나, 시험 점수만을 위한 겉핥기식 공부는 젊은 세대에게는 익숙하다.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가 남이 떠먹여 주는 지식만 찾는다면 사회적 수준이 앞으로 더 하향 평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을 가볍게 취하는 방법이 넘쳐나는 시대, 정작 보고 배울 것은 많고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배움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고 깊게 사고하는 지식 생활의 필요성을 다시 깨달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