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千一夜話)에는 사실 앞 뒷 토막이 있습니다.

우선 분노에 치를 떠는 왕의 광기. 최초의 왕비가 자신을 배신하고 남녀 노비들과 음란한 밤을 보냈기 때문에, 왕은 매일 새 왕비를 들이고 다음 날 아침 목을 벴다는 것이죠. 요즘 말로 하면 ‘여혐’(여성혐오)의 뿌리입니다. 뒷 토막에는 현실과의 타협이 있습니다. 1001일의 밤 이야기를 마친 뒤, 새 왕비 셰에라자드는 아이를 낳죠. 현실과 타협하고, 밤마다 지어내던 새 이야기도 중단합니다.

하지만 Books의 여름특집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살기 위해 매일 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던 어린 왕비 셰에라자드의 목숨을 건 창작.

Books의 여름특집 2회는 신간 소설입니다. 두 권의 한국문학과 두 권의 외국문학을 골랐습니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2016년 가장 젊은 한국문학 중 하나입니다. 올해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대상을 받은 표제작을 필두로 9편의 단편을 묶었습니다. 임성순의 길지 않은 장편 ‘자기개발의 정석’은 대한민국 중 ·장년 세대를 위한 Books의 추천입니다. 자의식이나 내면이 아니라, 회사라는 구체적 사회에서 벌어지는 포복절도의 블랙코미디죠.

‘모든 일이 드래건플라이 헌책방에서 시작되었다’와 ‘스테이션 일레븐’은 우리 시대의 차이와 격차를 줄여보려는 Books의 제안입니다. 실리콘밸리와 헌책방을 왕복하는 ‘모든 일이…’는 SNS와 종이신문 세대 모두에게, 지구 종말 이후에 펼쳐지는 삶 ‘스테이션 일레븐’은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 모두에게 권합니다.

이번 주에는 소설가 김훈이 읽은 ‘장자’를 함께 띄웁니다. "책 속에 무슨 길이 있나. 길은 길 위에나 있을 뿐"이라며 청탁을 고사하던 작가는, 일산 호수 공원의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은 ‘장자’에서 길 하나를 찾은 듯합니다.

[여름 휴가에 가져갈 단 한권의 책 ]

"이 부장이 처음 오르가슴을 느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여섯 때였다."

이런 남부끄럽고 불건전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라니. 탐닉과 쾌락을 위장하려는 까닭인지, 천연덕스럽게도 제목은 ‘자기개발의 정석’이다. 계발(啓發)이 아니라 개발(開發)임에 유의할 것. 지적 정신적 깨우침의 의미가 더 강한 어휘가 ‘계발’이라면, ‘개발’은 몸이건 마음이건 능력 발달의 용례로 더 자주 쓴다는 해석이 있다. 적자생존의 현대사회에서 대오각성(大悟覺醒)으로 정신적 돌파구를 찾자는 자기계발서와 달리, 이 ‘불건전하고 남부끄러운 작가’의 제안은 기쁨을 아는 몸을 만들어보자는 ‘은밀한 자기개발’이다. 대기업 부장으로 무난하게 살아왔던 마흔 여섯 기러기 아빠가 정수리가 쩡하니 열리는 능력을 개발하기까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임성순(40)이 소설 독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2010년. 장편 ‘컨설턴트’로 세계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다. 소설가로서 그의 특장(特長)은 회사와 회사원의 삶에 대한 디테일에 있다. 사회적 경험 부족한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투항하는 현실 속에서, 올해 마흔인 그는 회사라는 구체적 배경에서 자본주의를 질문하거나 비판하는 작품들을 주로 써 왔다.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부장 역시 회사에 목맨 대기업 부장이자, 캐나다 보낸 처자식에게 돈보내기 바쁜 기러기 아빠. 무거워진 몸뚱이, 짧아져가는 사정시간, 소변을 보다 끊은 듯 뒷맛이 나쁜 사정감으로 요약되는 슬픈 중년이다.

‘유격 면제 포경수술’ ‘첫 데이트에서 터진 설사’ ‘감춰 놓았는데 어느새 감겨 있던 침대 및 포르노테이프’ 등을 인생 최대의 위기 리스트 상위권에 올려놓았던 이 부장에게 1등의 자리를 바꿔 놓아야 할 사건이 생긴다. 전립선염 치료를 위해 찾았던 비뇨기과에서 해괴망칙한 ‘트인 바지’를 입게 된 것. 실리콘 장갑 낀 의사에게 전립선 마사지를 받는 이 부장은 치욕과 모멸로 몸을 떨지만, 미국에서 개발된 전립선 마사지 기구 아네로스를 사용하면서 다른 이유로 몸을 떨기 시작한다. ‘평균 미달’로 인한 자존감 없던 삶이, 타인의 도움이나 교감 없이도 정수리에서 불이 켜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기개발의 정석’이 중년 남성의 성적 탐닉이라는 선정적 흥행공식에만 집착한다고 오해하지 말 것.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끊임없이 쇄신하라’ 등 스티븐 코비의 자기계발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패러디하는 이 소설의 소제목들은, 이 웃기면서도 슬픈 블랙코미디가 내심 겨냥하고 있는 과녁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랄하게 보여준다. ‘바닥 없는 피곤’을 살고 있는데도, 한 삽 더 뜨라며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시틈에 대한 명랑한 반격. 새롭게 기쁨을 아는 몸이 된 이 부장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풍경은, 이 흡인력 강한 소설을 끝까지 읽어온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의 의의는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음을, 이 여름 혜량해주시길. /어수웅기자

걸크러시란 말이 유행이다. Gril(소녀)과 Crush On(반하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여성이 동성에게 느끼는 비(非)성적 호감을 뜻한다. 걸크러시 대상은 우월한 외모, 뛰어난 패션 감각, 지성을 갖추고 있어 여성들의 롤모델로 여겨진다고 사전에는 나와 있지만 실제 쓰임은 좀 다르다. 주변을 장악하는 아우라가 있는 ‘쎈 언니’ 혹은 여성미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매력적인 사차원. 이를테면 양희. 나는 지금 양희앓이 중이다.

양희는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에 나오는 여성으로 ‘동백꽃’과 ‘봄봄’의 점순이를 잇는 역대급 컬크러시 캐릭터다.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고백도 질문도 뭣도 아닌 양희의 이런 표현은 선배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양희의 사랑엔 목적이 없다. 느닷없는 고백에 허둥거리는 건 상대방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는 그를 향해선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아, 양희의 사랑엔 내일도 없다.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팀으로 좌천된, 이제 사십 대가 된 선배는 자신의 비루함을 힘들어하던 중 16년 전 양희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자 만나고 싶어진다. 거대한 회사에서 소외된 순간, 하필이면 뜨겁게 사랑하지도 차갑게 경멸하지도 않았던 양희가 보고 싶은 건 왜일까.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양희의 대답에 불가해한 기쁨을 느끼던 시절과 재회하면 패색 짙은 그의 삶도 구원될 거라 기대한 걸까.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대체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생의 한낮을 보내고 있으며 이혼, 구조조정, 빚, 외로움 등 저마다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인생이란 방어전을 그저 빈손으로 치러내야 하는 사람들에겐 복기(復碁)가 유일한 무기라는 듯, 이들은 앞날을 도모하기도 바쁜 와중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때마다 매복돼 있던 기억들이 나타나 소진된 삶을 충전시켜 주는 건 신의 선물일까 삶의 이치일까. 과거와 현재가 아슬아슬하게 연대하며 만들어 내는 기묘한 에너지와 볼품없는 삶의 현장에서도 대충 손털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건강한 캐릭터. 김금희 소설을 읽으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고 지나간 세계를 회상하고 싶어진다. 그 정적인 매력이 우리를 자꾸 김금희 김금희 하게 만든다.

멈춰 있는 시간도 아까운데 돌아보라니,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 자그마치 휴가철이다. 안심하고 돌아보며 '자유연상과 나비효과'에 머리를 맡겨보면 어떨까.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떠오르는 부유물이 아니다. 돌아보는 사람만 지난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있고, 추억이 돈이나 명예보다 위력적인 순간은 분명히 온다. 이 책을 읽으면 그걸 알 수 있다. 양희와 선배의 슬프고 멋진 재회가 궁금하지 않은가. /박혜진·문학평론가·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책을 읽는 내내 오래된 책들이 쌓였을 때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 끝에서 떠나지 않는다. 헌책방이나 다락방, 서재와 연결된 아득한 기억이 없다면, 책을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설은 이 ‘오래된’ 공간을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의 심장 실리콘밸리 한가운데로 옮겨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세계 금융위기의 광풍(狂風)이 지나간 2009년 여름, 자신이 창립 멤버인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쫓겨난 매기는 헌책방 ‘드래건플라이’에 틀어박혀 소설을 읽으며 지낸다. 개발자인 남자친구는 한 몫 챙겨 뜬 지 오래. 구직활동은 끝나지 않고, 밀린 집세 걱정,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부모의 성화가 끊이지 않는다.

서가 한 구석에서 너덜거리는 1960년대 판 '차탈레 부인의 연인'을 찾아 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쪽 여백엔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가 주고받은 밀애(密愛)의 메모가 빼곡했다. SNS로 하루에 수십 건의 메시지를 주고받고 잠시만 와이파이가 끊어져도 폭발할 것 같은 요즘 세대들이 한 줄 한 줄 쓸 때마다 생각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이 '구식 SNS'에 푹 빠져 버린다. 소설은 책이라는 유구한 미디어에 대한 찬사이자,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속도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매기가 메모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올리자 온라인에선 하루 10만 명의 방문자가 찾아들고, 파리만 날리던 헌책방은 실리콘 밸리의 '핫 스팟'으로 떠오른다.

게이 개발자, 레즈비언 투자자, 게임 마니아, SF ‘ 덕후’ 등 헌책방이 무대인 소설에 등장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는 인물들이 나와 자기 목소리를 낸다. 2000년대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지난 세월을 품고 이곳까지 왔다. 아무리 첨단 문명을 달려도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고 보니 미국 서부에서 꽃 피운 IT 산업 역시 1960년대 히피들이 선조 아니었던가. 여러 사람을 거쳐 드래건플라이까지 온 헌책 역시 수많은 과거를 담고 있다. 반면, 새 책들은 “과거가 없는 사람 같다.” 그래서 소설 속 이 구절은 오래된 것에 대한 찬사이자, 흠 많고 실수투성이인 채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대한 위로로 들린다.

이이 소설은 서양 문학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 ‘잘못 전해진 편지’ 모티브를 정말 잘 활용했다.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란 비난을 무릅써야 하기에, 휴가 때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란다. 원제는 ‘The Moment of Everything’. 저자 역시 실리콘밸리의 여러 스타트업에서 프로젝트 매니저, 소셜 미디어 전략가 등으로 일하다 해고된 전력이 있다. 책 전체를 감싸는 경쾌한 유머, 사고와 경험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장들은 만만치 않다. ‘그는 맨발인 내 오른발을 양손으로 감싸 쥐더니 발바닥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치마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같은 표현에선 ‘칙릿’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20·30대 여성이 많이 보는 소설)의 분위기도 물씬하지만 분명 그 이상이다. /신동흔 기자

발병 48시간 내 사망하는 급성 독감이 퍼진다. 몰살. CNN이 방송을 종료한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인류가 멸망한다. 지구는 기술을 잃고 퇴보한다. 전염병과 사회 붕괴를 그린 뻔한 SF소설 같겠지만, 좀 다르다. 좀비나 학살극 따윈 나오지 않는다. 여타 종말론이 혈흔으로 번들거리는 유화라면, 이 책은 수채화에 가깝다.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리어왕’ 속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캐나다 토론토의 한 극장에서 리어왕을 연기하던 배우(아서)가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한 관객(지반)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인공호흡을 하지만, 배우는 끝내 숨진다. 이 장면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커스틴)가 있다. 그리고 곧 종말이 온다. 세계의 종말 20년 후, 어느 유랑 악단의 마차가 7월의 북미 대륙을 지나고 있다. 이 마차에 숙녀가 된 커스틴이 앉아있다.

조지아 독감. 이 아름다운 질병의 이름처럼, 몰락 이후의 문명은 여전히 요요하다. 바뀐 세상의 황혼녘, 마을에서 상연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미시간호(湖), 미지의 여행을 계속하는 마차. 소설은 SF 장르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서정적 필치로, 아서와 지반과 커스틴과 그 외 수많은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서로의 연결고리를 그려낸다.

소설 제목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가 커스틴에게 선물한 그래픽노블(만화)의 제목이자 배경. 태양 없는 난파된 우주정거장, 이곳 사람들은 머리 위에 떠있는 바닷물을 의식하며, 명멸하는 인공 불빛에 의지하며, 언젠가 자기의 진짜 삶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평생을 살아간다. “우린 햇빛을 꿈꿔” “우린 집에 가고 싶을 뿐이지” 같은 대사를 통해 이 만화책은 소설 내내 일종의 예언서로 기능한다.

소설은 결국 생존 이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한 인간은 털복숭이가 돼버린 무리 사이에서 나흘에 한번씩 면도를 한다. 누구는 연주회를 열고 또 누구는 서로의 언어를 나눈다. 모닥불을 피우고 사슴 가죽을 벗기면서 과거의 문명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느날, 사람들은 망원경 너머 전기로 거리를 환히 밝힌 한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

자칫 지루한 감성소설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가슴 졸이는 서스펜스도 탄탄하다. 커스틴이 속한 유랑 악단은 ‘예언자’라 불리는 청년이 지배하는 한 마을에서 공연을 펼친 뒤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악단 마차에 몰래 올라타 가출을 감행한 소녀 때문이다. 소녀는 예언자의 신붓감이었다. 칼과 총과 석궁이 벌이는 백병전이 맥박을 뛰게 한다. 이 책은 지난해 미국 타임지(紙)가 선정한 ‘2015 최고의 책’이었다. 영화화도 결정됐다. 미국 ‘뉴요커’는 “대중성과 문학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순문학과 장르 문학이 표방하는 거의 모든 가치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확인해 보시라./정상혁 기자

편집국 창밖으로 여름 매미가 웁니다.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처럼, 바위 속으로 스며드는 고요함. Books의 여름 소설과 함께 고요한 여름을 보내시기를.

어수웅·Books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