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사는 회사원 최여정(가명·여·29)씨는 지난 주말(1일) 어머니 소개를 받고 집 근처의 한 고급 오피스텔을 방문했다. 아무 간판이 없는 26㎡(약 8.6평) 크기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구호' '르베이지' 등 전문직 여성이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 의류 수십 점이 진열돼 있었다. 그런데 이 옷들엔 브랜드를 표시하는 태그(tag)가 붙어있지 않았고, 가격도 정품의 절반 수준이었다. 옷 4벌을 산 최씨는 "결혼식 같은 중요한 날에는 명품 옷을 꺼내 입지만, 평소엔 이 옷들을 입고 회사에 출근한다"고 말했다.
'절반 가격에 명품을 판다'는 일명 '로스(loss)' 매장이 서울 강남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인터넷에는 '로스'를 판매하는 비공식 카페가 100곳을 넘는다. 로스는 사전적인 의미로 손실이나 불량을 뜻하지만, 의류업계에서는 브랜드 태그가 없는 명품 제품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된다. 명품과 똑같은 재료와 디자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디자인만 베껴 대량생산되는 짝퉁과는 다르다. 로스는 소량(少量)으로 비밀리에 유통되기 때문에 가격도 짝퉁보다 20~30%가량 비싸다. 지난해 초까지 명품업체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맡았던 공장장 신모(55)씨는 "명품업체가 공장에 100개를 주문하면 97개를 제대로 납품하고 나머지 3개는 불량(로스) 처리한 후 로스 매장으로 넘긴다"고 말했다. 명품업체들이 태그에 일련번호를 부여해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로스 매장들은 태그가 없는 제품을 파는 것이다.
로스 거래는 회원제나 점조직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회원을 통해 추천받거나 신분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로스를 사기 힘들다. 로스 매장들은 "○○엄마에게 소개받았어요"라는 문의 전화가 오면, 다른 회원들에게 재확인을 거친 뒤 고객 명단에 포함시킨다. 서울 역삼동의 한 로스 매장은 압구정동에 사는 주부 60여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이 매장은 1주일에 10여개의 로스를 거래하는데, 회원이 로스를 주문하면 집까지 배달해준다. 이 매장 사장 정모(여·33)씨는 "회원들이 백화점 매장에서 명품을 입어보고 제품명과 사이즈를 알려주면 내가 공장에 로스 제품을 주문한다"고 말했다.
로스는 명백한 불법이지만, 단속에 잘 걸리지 않는다. 강남구청 유준규 특별사법경찰관은 "주부 모임을 통해 거래가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적발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