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시간 5분, 폭소는 없었다. 간절한 하소연이 이어졌다. “개인기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대답은 냉정했다. “아뇨.” 지난 30일, KBS 공채 31기 개그맨 최종 시험을 치렀다. 1·2차 예선을 거친 개그맨 지망생 89명이 마지막 관문을 두드렸다.

◇"매년 수준 떨어져… '통조림식 개그' 많아"

응시자 1명과 '도우미' 1~2명이 함께 들어와 준비해온 연기, 지정 연기, 개인기 순으로 끼를 선보였다. 오전 10시, 첫 응시자가 등장했다. 돌팔이 의사를 연기하며 잇따라 유행어를 염두에 둔 대사를 날렸다. 김진홍 예능국장, 개그콘서트 제작진 등 심사위원 8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정 연기는 개그콘서트 코너 '1대1' 대사 패러디. 퀴즈쇼 사회자가 문제의 정답으로 '야망의 전설'을 유도하면, '야설의 전망' 식으로 음절을 섞은 답을 내놓았다. 이날 응시생 옆에서 지정 연기를 도운 29기 개그맨 홍현호씨는 "(후배들이) 기본기는 있는데, 그 이상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지난 30일 서울 여의도 KBS TV공개홀 합창단 연습실에서 열린 31기 공채 개그맨 최종시험에서 한 응시자가 가수 김광석을 따라 하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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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세다대 출신 고학력자들도 눈에 띄었지만, 응시생 대부분은 대학로 극단에 소속된 아마추어 개그맨이었다. 김호상 책임PD(CP)는 "매년 수준이 떨어진다"며 "기존 인기 코너나 소재를 답습하는 '통조림식 개그'가 많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썰렁하니 에어컨 좀 꺼달라"는 말을 연달아 했다. 오전 심사는 12시 5분에 끝났다.

◇외모 폭탄, 시사 개그 실종… "아이디어 평범, 연기력으로 평가"

오후 1시 심사가 재개됐다. 파출소에서 일어나는 소극(笑劇) 등 익숙한 포맷이 다수였고, 개인기는 성대모사로 천편일률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아이디어는 별 기대 안 한다"며 "연기력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다. 한 남성이 로봇 연기를 펼쳤다. 주인이 양말 손빨래를 시키자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하거나 "나는 감정이 없다"면서도 구린내에 구역질을 하는 개그였다. 처음으로 심사위원 사이에서 '풉' 소리가 났다. 그는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과거 정종철·오지헌 등 '개콘' 전성기를 이끈 '외모 폭탄'은 실종 상태였다. 이정규 PD는 "작년엔 연기력 위주로 선발해 올해는 개성 강한 신인을 기대했는데 눈에 띄질 않는다"고 했다. 이명박 전(前) 대통령을 흉내 낸 남성 1명을 제외하면 시사 개그 역시 자취를 감췄다. 이날 조준희 PD는 시사 개그를 하다 어버이연합에 고소당한 개그맨 이상훈씨의 경찰 조사에 참석하느라 오후 심사에서 빠졌다.

◇개그계에 부는 힙합 바람… ‘쇼미더머니’ 인기 무섭네 이날 힙합을 소재로 개그를 선보인 응시생은 11명. 특히 케이블 채널 Mnet ‘쇼미더머니’의 강세가 뚜렷했다. 래퍼 비와이·정상수 등 ‘쇼미더머니’ 출연진을 흉내 낸 참가자도 상당수였다. 평균 연령 25세, 최고령 31세에 불과한 젊은 응시자들이 트렌드를 적극 흡수한 결과라는 평이 나왔다. ‘프로듀스101’ 등 케이블 프로 패러디는 여럿 나온 반면, 지상파 얘기는 찾기 어려웠다. 올해 KBS 공채 응시자는 800여 명. 지난해 1300여 명에 비해 뚜렷한 감소세다. 최근 시청률 한 자릿수까지 추락한 ‘개콘’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오후 5시쯤 심사가 끝났고, 다음 날 합격자 10명이 발표됐다. 김영도 CP는 “한 기수에서 한 명만 터져도 성공”이라고 했다. 이들은 4일 첫 출근 해 2개월 트레이닝 후 실전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