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영화 '양철북'에서 뱀장어는 혐오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미끼로 던진 말머리를 끄집어내자 눈코입에서 스멀스멀 뱀장어가 기어나온다. 그 뱀장어로 요리를 만들어 임신한 아내에게 강요한다. 아내는 구역질한다. 영화를 본 지 3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역겨운 느낌이 남아 있다. 나치 지배를 받는 폴란드가 무대였다. 말머리 속 뱀장어는 파시즘에 기생하는 인간, 뱀장어 요리는 파시즘의 폭력을 상징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 영화 '우나기'에서 뱀장어는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불륜 아내를 살해한 주인공이 8년 뒤 감방에서 키우던 뱀장어 한 마리를 들고 가석방된다. 세상과 담을 쌓은 주인공 곁에는 그 녀석뿐이다. 주인공은 점점 세상의 온기 속에서 공감 능력을 되찾는다. 새 이성도 만난다. 훗날 주인공이 다시 교도소로 들어갈 때 여자는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뱀장어가 여행하는 거 아닌가요?" 이걸로 끝이다. 내 나름대로 '꼭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뱀장어는 어감이 안 좋다. 생긴 것도 별로다. '양철북' 이미지가 딱 맞는다. 하지만 뱀장어의 일생은 '우나기' 이미지에 훨씬 가깝다. 신비한 생명이다. 민물에서 5~12년을 살다 바다로 나간다. 3000㎞를 헤엄쳐 고향인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에서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연어와 반대 코스다. 알에서 나온 치어, 실뱀장어는 엄마·아빠가 간 길을 따라 민물로 돌아간다. '무한 회귀(回歸)'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실뱀장어가 민물에 도착하는 순간 인간 손에 잡힌다. 수조에서 몇 개월 속성으로 자라 도마에서 생을 마치고 음식점 불판에 오른다. 우리가 지금 먹는 모든 뱀장어는 어린 시절 3000㎞ 바닷길을 돌파한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다.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지 멸종 위기에 다가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이 7할을 먹는다. 중국인도 장어 맛을 알기 시작했다니 큰일이다. 민물과 바닷물을 막는 인간의 갖가지 개발도 그들의 귀향길을 막고 있다.
▶인간이 뱀장어 양식(養殖)에 도전한 게 백 년이 넘는다. 뱀장어의 무한 회귀를 인공으로 재연하는 셈이다. 인공수정으로 만든 치어가 생식 능력을 갖춘 뱀장어로 자라 대(代)를 잇는 반복이다. 일본은 6년 전 성공했다. 한국도 얼마 전 드디어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량생산에 도달해야 밥상에 오를 수 있다. 일본은 아직 이 벽을 넘지 못했다. 뱀장어의 삶 대부분이 아직 베일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민물의 실뱀장어들이야말로 지금 인간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