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1928~ 2007)은 196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00여 점의 ‘벽 드로잉’ 시리즈를 만들었다. 하지만 르윗은 그 ‘개념’만 구상했고, 실제로 벽에 그림을 그린 건 그의 조수들이었다. 벽 드로잉은 공간을 확연하게 변화시키는 놀라운 작품이지만, 그리는 방법은 단순해서 누가 그려도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제작자가 반드시 그의 조수일 필요도 없어서, 때로는 미술관 근교에서 모집한 자원봉사자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르윗은 각 작품에 대한 설명서를 작성했고, 언제 어디에 누가 그렸더라도 설명대로만 했다면 그게 바로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디어란 소유나 독점이 가능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아이디어를 이해했다면 바로 그 주인이 된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르윗은 진보적인 미술가였다. 그는 미술가란 뛰어난 창의성과 손재주를 갖추고,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작품으로 표출해내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나아가 위대한 미술가가 창조해낸 유일무이한 진품만이 고가(高價)에 판매되는 미술 시장의 원칙에서도 벗어나고자 했다.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그런 미술을 꿈꿨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윗은 완성작에 참여했던 모든 조수의 이름을 늘 전시장에 함께 적었고, 스스로 유명인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공적인 자리에 나서지 않고, 모든 종류의 상(賞)을 거부했으며, 사진조차 잘 찍지 않았다. 요즘처럼 유명인의 이름을 내걸고, 헐값으로 남의 손에 맡긴 그림도 ‘개념미술’이라고 한다면, 죽었던 르윗이 무덤을 박차고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