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이동통신재판매(MVNO)법, 북한인권법, 테러방지법,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특별법….
앞서 나열한 것들은 여야가 의견 충돌한 쟁점 법안으로 해당 임기 내 처리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지층의 비판이 두려워 다음 국회에 책임을 떠넘긴 여야 의원들이 마지막 본회의에서는 어떤 법안들을 처리했는지 알아봤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출범한 13대 국회부터 얼마 전 물러난 19대까지, 역대 7개 국회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떼밀어” “밟아” 국회의장 안경 깨진 13대 국회
13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의 종료일인 1991년 12월 18일, 여야 의원들 간 몸싸움 끝에 법안 3건이 10여 초 만에 ‘날치기 통과’됐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온종일 박준규 국회의장의 본회의 입장을 막았고, 그 과정에서 험한 욕설에 옷을 찢거나 얼굴을 때리는 등 폭력까지 오갔다. 의장 전용통로로 몰래 들어온 박 의장은 본회의 종료 15분을 앞두고 야당이 반대하는 법안 3건을 상정, 여당인 민자당 의원들만의 찬성으로 처리됐다.
이렇게 여야 의원들을 몸싸움까지 벌이게 했던 법안 3건은 ‘추곡수매동의안’과 ‘제주도개발특별법’, ‘바르게살기운동조직육성법’이었다.
선거구 나눠 먹기 한 14대 국회
헌법재판소가 총선 지역선거구 구역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선거구 조정을 위해 1992년 1월 10일 14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렸다.
헌법재판소는 “전국 선거구 평균 인구수(17만5460명, 1991년 6월 30일 기준)의 상하 60%(인구 편차 4대 1 이내)로 인구 상하한선을 적용, 이를 벗어나면 헌법에 위배된다”며 최대 및 최소 선거구간의 인구 편차 허용 기준을 제시했다.
평균 인구수를 집계하는 날짜를 언제로 잡을 것인지, 선거구획정 원칙(한 행정구역을 다른 행정구역 일부와 합쳐 선거구를 못 만든다) 을 지키지 않는 예외 지역을 둘 것인지 등에 따라 선거구 조정이 달라지므로, ‘텃밭’을 사수하기 위해 여당인 신한국당과 야당 3당인 국민회의, 자민련, 민주당 등 각 정당의 신경전이 거셌다.
결국, 지역구는 260석에서 7석 줄어든 253석, 그만큼 전국구(비례대표)를 늘려 46석으로 조정, 전체 정원은 299명으로 유지하는 통합선거법 개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또한, 예외 선거구는 여야가 서로에 유리한 각 2곳씩 총 4곳을 인정하며 선거구를 두고 담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은 총선(4월 11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의원이 선거 운동하느라 본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한동안 참석을 독려하는 안내 방송이 울리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의결정족수를 겨우 넘긴 149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이마저도 민생 걱정∙대통령 비판 등 인기 영합성 발언을 쏟아내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도입한 15대 국회
15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는 고위 공직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특위) 상설화,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 등 국회의 위상을 높이는 내용의 법안들이 처리됐다.
우선, 여야는 국회에 인사청문특별위원회를 신설해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 공직자들에 대해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한 ‘국회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인사청문회 대상은 국회의 임명 동의가 필요한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13명) 등 고위공직자 17명과 국회에서 선출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3명) 및 중앙선거관리위원(3명) 등 모두 23명으로 정해졌다.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은 인사청문회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국회법 개정안은 예결특위 상설화, 2∙4∙6월 등 짝수달에 임시국회 자동소집, 법안 실명제 등을 담고 있다. 예결특위가 상설화됨에 따라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됐던 수십조원 규모의 예산안 심의가 까다롭게 돼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가 강화됐다.
정당별로 국회의원과 시∙도의원 비례대표 후보 가운데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정당법’, 국회에서 위증한 증인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국회의 증언∙감정법’ 등도 개정됐다.
이날은 국회의원 정수를 26명 감축하는 선거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별 인구 상하한선을 35만명~9만명(인구 편차 1 대 3.88)으로 조정하면서 지역구 의석수는 현행 253석에서 26석 줄어든 227석, 비례대표는 46석으로 유지, 이로써 총 의석수는 273석이 됐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전국 정당화(전국에 의원 배출)'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1인2표제와 지역구∙비례대표 2중 후보등록제, 석패율제(아깝게 당선되지 못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당선) 도입은 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는 '캐스팅보트(Casting Vote, 가부동수 시 결정권)'를 쥔 자민련이 한나라당에 손을 들어준 결과였다.
한편, 선거법 개정안을 협상하는 데 시간이 지체돼 15대 국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됐던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대통령직인수법’과, 체계적인 독도 개발을 위한 ‘독도개발특별법’, ‘사형제도폐지특별법’은 미처리 법안으로 남게 됐다.
대통령직인수법은 3년 뒤 다음 국회에서 처리됐지만, 독도개발특별법은 한·일 외교 갈등과 환경 훼손 우려, 반인류적인 범죄자 처벌 등 각각 반대 의견이 있어 계류-발의-자동폐기를 아직 반복하고 있다. 사형제도폐지특별법도 계속된 반인륜적인 범죄 사건으로 폐지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 여전히 논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56년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안’ 가결한 16대 국회
2004년 3월 6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16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회견에서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열린우리당(여당)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등의 발언으로 야당의 반발을 샀다. 때마침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노 대통령이 선거 중립의무 규정(선거법 9조)을 위반했다”는 결정이 나오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중심으로 탄핵안이 추진됐다. 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등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여소야대 정국 상황에서 국회 재적 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받기에 무리가 없었다.
탄핵안 이슈에 밀려 ‘호주제* 폐지법과 북한 인권 실태 조사의 토대를 마련하는 ‘북한인권법’, 국가정보원장 산하 ‘대(對)테러센터’ 신설 등의 내용을 담은 ‘테러방지법’은 16대 국회에서 끝내 처리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호주제 폐지법은 다음 국회에서 여야의 큰 대립 없이 의결된 반면,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의 일반 국민에 대한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17대, 18대 국회에서도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2016년 3월 2일 19대 국회 정의화 의장의 직권상정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던 날 북한인권법은 재석 의원 212명의 찬성을 받고 통과됐다.
[선관위 "盧대통령 선거법위반 국민모두가 아는 사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끝난 17대 국회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려는 정부∙여당과 미국과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다는 야당이 싸우다 17회 국회는 막이 내렸다.
한미 FTA는 참여정부 때부터 추진해오던 외교 안건으로, 협상 권한을 넘겨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타결했다. 그러나 야당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조항을 광우병 유발 우려와 연계해 문제 삼았고, 서울·부산·광주 등 전국 13개 도시에서 광우병 촛불 집회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우병이 발생하면 바로 수입을 중단할 것이고, 미국과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추가 협상에 나서겠다”면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며 17대 국회 내 처리를 호소했지만, 야당은 “전면 재협상”을 요구해 끝내 무산됐다.
다음 국회가 들어선 직후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 ‘30개월 미만’으로 합의를 이뤘고, 한미 FTA 비준안은 3년이 더 지난 2011년 11월 2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17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는 야당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책임을 묻겠다며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상정했지만 부결됐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6급 이하 중앙공무원의 정년을 늘려 5급 이상 공무원과 일치시키는 `국가공무원법'과 성폭력범죄 관련 3대 법률 개정안이었다. 성폭력범죄 관련 3대 법률 개정안은 13세 미만 여아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 처벌 강화, 상습 성폭행범에 대해 전자발찌 부착, 소아기호증 등 정신질환자 격리 치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가계 통신비 절감을 위해 가상이동통신(MVNO) 서비스*를 도입하는 '재판매법'과 군필자에게 취업 시 가산점을 주는 ‘병역법’ 개정안은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으나 자동폐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재판매법은 1년 반 뒤 다음 국회에서 처리했고, 군필자 가산점제는 ‘미필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반대 의견이 팽팽해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몸싸움 방지법’ 통과시킨 18대 국회
18대 국회는 의원과 보좌진들이 막말과 주먹다짐은 기본, 본회의장에 망치, 쇠사슬, 최루탄 등 장비까지 동원해 서로를 위협했다.
본회의장이 정치인들의 싸움터가 된 모습을 지켜보며 국민은 18대 국회를 ‘동물 국회’, ‘K-1 격투기 국회’, ‘폭력 국회’ 등으로 부르며 혀를 찼다. 여야는 다음 국회에서는 이런 폭력이 되풀이돼서 안 된다며,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을 만들어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몸싸움 방지법은 ‘국회 선진화법’이라고도 하는데, 의장 직권상정 권한을 축소하고, 쟁점 법안 처리에 필요한 의석수를 기존 과반에서 ‘5분의 3’으로 높이는 등의 내용이 담긴 국회법 개정안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개정안에 ‘필리버스터(filibuster,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 제도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다수당이 법안 통과를 단독 처리하려고 할 때 몸싸움이 아닌, 무제한 토론이라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방해할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는 감기약·소화제 등 가정상비약의 편의점 판매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과 112 긴급구조 요청 시 경찰이 위치 추적을 할 수 있는 ‘112위치추적법’, 외국 어선의 불법 어업활동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배타적경제수역법’ 등이 처리됐다. 그러나 각 참모총장에게 작전지휘권을 부여하는 등 군 지휘구조를 개편하는 ‘국방개혁안’은 작전 합동성이 떨어진다는 반대 측이 맞서면서 18대 국회 처리가 무산됐다. 법인이나 단체의 구성원의 ‘쪼개기 후원금’을 가능하게 해 입법 로비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을 받았던 ‘정치자금법’ 개정안도 자동 폐기됐다.
['60% 다수결'… 몸싸움 줄겠지만 식물국회 우려 ]
[112 신고땐 위치추적, 中어선 불법조업 처벌 강화]
쟁점 법안은 나 몰라라 한 19대 국회
법안 처리율이 역대 가장 저조한 19대 국회는 ‘식물 국회’라는 오명을 썼다. 여기에는 국회 선진화법에 발목 잡혀 말싸움만 하다가 정치가 실종됐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야는 임기 종료를 앞두고 129건의 법안을 처리했지만, 사법시험 존치를 담은 ‘변호사시험법’ 개정안 등 찬반이 팽팽한 법안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노동개혁 4법’과 전략산업 지역에 규제를 완화해주는 ‘규제프리존법’, 서비스산업을 지원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기한을 연장하는 ‘세월호특별법’,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위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특별법’ 등 여야 간 타협이 필요한 법안들도 휴짓조각이 됐다.
반면,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임시국회를 8월에도 열도록 하는 '국회법'과 주민번호를 변경할 수 있게 한 '주민등록법', 전·월세 전환율 산정 방식을 변경해 금리 하락 효과를 보게 하는 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이다.
전북을 탄소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탄소법(탄소소재 융복합기술개발·기반조성지원법)', 사망이나 중증상해 피해를 본 의료사고 당사자나 유족이 의사나 병원의 동의 없이 분쟁 조정을 개시할 수 있는, 일명 '신해철법(의료사고피해구제및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도 통과했다.
20대 국회는 야당이 원내 1당인 여소야대 정국이자 다당체제이기 때문에 이전 임기보다 더 법안 처리 속도가 더딜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 나온다. 이러한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여야가 협치(協治)를 통해 폐기 수순을 밟는 법안을 최소화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 참고: 국회 홈페이지 의안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b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