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박찬욱스러운' 영화다.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친절한 금자씨')라는 대사처럼 이 영화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 작품이고, "웃어라. 모두가 함께 웃게 될 것이다"('올드보이')라는 대사처럼 이 아름다움을 파고드는 기괴한 유머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스토커')라는 대사처럼 평범한 이야기를 새로운 감각으로 재창조한다. 박찬욱은 박찬욱이다.
그러나, 박찬욱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결론은 자못 당황스럽다(박찬욱의 말처럼 "너무나 명쾌하다"). 이것을 '박찬욱 멜로의 탄생'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그는, 거칠게 분류하자면, 이미 멜로를 여러차례 만들었다. '올드보이'(2003)가 최면에 걸린 '미친' 사랑 이야기였고, '박쥐'(2009)는 재가 돼버린 '지독한' 사랑 이야기였다. 반면 '아가씨'는 '정직한' 사랑 이야기다. 정직함, 그것은 분명 박찬욱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중요한 건 박찬욱이, "명쾌하다"라는 그의 말처럼, 실로 의도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도대체 박찬욱은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개봉 첫날 반응이 좋다.
"방심은 금물이다. 우리 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감독들의 평가도 나왔다. 그중 변영주 감독의 평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가씨'에 대한 변 감독의 평가 중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니, 박찬욱 영화에 대한 언급으로는 매우 생경했다.
"어떤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변영주 감독은 페미니스트이니까, 그 입장에서 봐도 '아가씨'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기도 하다. 메일 게이즈(male gaze·남성의 시선),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잠시 말을 멈춘 박 감독은 노트북으로 변영주 감독의 멘트를 확인했다) 아…변 감독의 이 한 마디는 굉장히 힘이 난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고, 나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다."
-바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가장 궁금했던 건, 역시 이 영화의 결말이었다. 박찬욱에게 해피엔딩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 않나. 박찬욱의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부조리(不條理)다. 결말 역시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조리에서 조리(條理)로 넘어가는 결론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핑거 스미스'는 통속 소설의 전통을 따르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어떤 결말을 맞을까, 손에 땀을 쥐고 보게되는, 그런 의도를 가진 소설이다. 난 작가(새라 워터스)의 의도에 너무 잘 놀아난 것이다. 꼭 연속극을 보는 시청자 같았다. 저놈은 죽어야 돼, 얘네는 맺어져야 돼, 이런 식으로 작가한테 메일을 보내고 그러지 않나. 시청자의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것 말고, 의도는 없었던 건가.
"내가 원하는 결말은, 사랑하는 두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얻고 쟁취하고 진정한 쾌락을 즐기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걸 왜 원했을까, 생각해봤다. 히데코가 어린 시절에 얼마나 학대를 당했나. 그것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행복한 결말은 선물받아야 했다."
-정확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은 딸을 잃지 않나. 물론 그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결국 죽는다.
"경우가 좀 다르다. 히데코는 어려서부터 학대 당했다. 자기 선택이 아니었다. (불행의) 강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가씨'에 대해 말할 때 "명쾌한 영화"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단순히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걸 떠나서 영화가 전체적으로 명확하고 쉬웠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가.
"원작을 읽을 때 느낀 기분대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게 맞다고 본 거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가 느낀 그대로 만들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친절하게 느껴지는 건 구성 자체가 한 번 본 장면을 다시 반복하기도 하고, 설명에 설명을 덧붙여 가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시간을 왔다갔다 하는 게 있지 않나. 그 부분으로 관객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당신의 이런 선택들을 두고, 너무 안전한 선택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글쎄…안전한 선택이 아니라 합당한 선택이다. 장르영화로써 후련한 결말을 낳고 싶었다. 히데코나 숙희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아주 우아한 방법으로 두 악한을 응징하는 게 참 절묘했다. 두 남자는 그런 식으로 취급당해도 싼 악한들이고. 그러면서도 백작은 일말의 동정이 가는 남자로 만들고 싶었다. 백작은 어리석지만, 히데코를 정말 좋아했다. 뭐 이런 거다."
-감독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긴 건 아니라는 말로 들리는데.
"잘 모르겠다. 변했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다음 영화가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건 그때 가서 판단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내가 크게 변했다고 보기보다는 그때 그때 이 스토리에 맞는 결말이 뭔지 고민하는 것 뿐이다."
-'아가씨'는 분명히 멜로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 영화에는 언제나 멜로가 있었다. '올드보이'(2003)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도 그랬다. 이 멜로의 정서는 어디서 오는 건가.
"모든 이야기에는 사랑의 테마가 들어있다. 내가 다루는 사랑은 낭만주의적인 면이 강한 것 같다. 사랑의 힘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숭고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지지고 볶는 그런 사랑보다는 좀 더 극단적이고, 그 극단적인 고통을 이겨내는 식의 사랑이다. 또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투쟁하는 식의 낭만주의적 사랑이다."
-이전의 박찬욱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도 생겼다. 바로 숙희다. 숙희는 밝고 순수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고 솔직하고 결단력이 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런 인물이 이전 작품에는 없었다.
"(웃음) 원작에서 출발해 더 진취적이고 더 용감한 사람으로 그렸다. 하지만 숙희는 당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기가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속고 있다. 헛똑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희는 히데코나 백작보다 우월하다.
-히데코에게 달려가서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이모부의 서재 콜렉션을 망가뜨리고, 담을 넘을 때 히데코를 끌어주는 것도 숙희다.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정신병원에 제 발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정한 승자, 그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숙희다."
-숙희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 히데코의 대사 중 이런 게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감동적인 대사였다. 이 대사가 '아가씨'를 집약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그렇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생각이 났다. 창작의 과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다. 구원자라는 건 이중의 의미다. 히데코의 원래 계획대로 됐어도 숙희는 구원자다. 숙희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숙희와 한 팀이 된 것 점에서도 숙희는 구원자다. 이때 진정한 구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고민해서 나온 대사는 아니다. 저절로 써졋다."
-히데코에 대한 숙희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소품은 신발이었다. 히데코가 준 신발을 숙희는 벗지 않는다. 사랑의 징표랄까. '박쥐'에서도 그랬다. '상현'(송강호)은 '태주'에게 구두를 벗어준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상현의 구두를 보여준다. 신발에 이런 의미를 담는 이유는 뭔가.
"정서경 작가와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박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과 '친절한 금자씨' 때부터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신발은 여러모로 효과가 좋은 소품이기도 하다. 신체의 일부 같은 물건이다. 작고 쉐이프(shape)가 똑 떨어진다. 이 작은 물건 안에 신체 일부가 쏙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는 느낌이 좋다. 커가면서 크기가 달라지기도 하고, 마치 신체의 연장(延長) 같다. 또 한 편으로는 히데코는 장갑을 끼니까 그에 상응하는 물건으로 신발이 좋다고 봤다."
-올해 칸에서도 그랬고, 지금껏 박찬욱 영화에 대한 평가는 항상 엇갈려왔다. 어느 한쪽에서는 극찬을 쏟아내는 반면, 일부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비판,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런 평가들이 작품 활동에 영향을 주고 있나.
"우선, 나는 나에 대한 비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도 안 들여다본다. 논쟁을 일으킨다거나 또는 혐오감정을 유발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들이 (내 영화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걸 지켜보면서 고소해하고,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끌리는대로 작품을 만드는 걸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렇게 만들면 남들이 싫어할 것이라고 말을 해도 말이다. 어쩌겠는가. 작품이 더 좋아질 수 있다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나빠지는 방향의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만약에 내 영화가 사람들로부터 만장일치 지지를 받는다면 더 당화스러울 것 같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생각이 들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