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증권사 영업 담당 임원 A씨는 단골 고객들이 유망 투자처를 귀띔해달라고 부탁하면 "코스피가 1900선 가까이 떨어지면 지수 연동형 ETF(상장지수펀드)를 사서 2000포인트 언저리에서 팔라"고 조언한다. 이렇게만 해도 은행 이자보다 높은 4~5% 수익을 쉽게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코스피는 쭉 이런 움직임을 보일 게 뻔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조언하긴 하는데, 한편으론 국내 증시에서 그다지 큰 수익을 기대할 게 없다고 보는 셈이라 씁쓸하다"고 말했다.
코스피가 도로 제자리다. 작년 마지막 거래일을 1961.31포인트로 마친 코스피가 지난 20일 1947.67포인트로 마감했다. 올 2월 중순 1830선까지 급락했다가 4월 중순 2022포인트로 급등했지만, 관성의 법칙처럼 다시 1900대 초반으로 수렴하고 있다. 시야를 넓혀보면 금융 위기 이후 급격히 회복됐던 코스피 그래프가 2011년 중반 이후부터 줄곧 1800선에서 2000선 초반 사이를 규칙적으로 '진동'하고 있다. 박스에 갇힌 것 같다 해서 '박스피(박스+코스피)'란 별명이 붙은 지 오래다. 우리 경제의 성장성에 대한 의구심이 이런 결과를 낳았지만, 점점 더 많은 투자자가 같은 생각을 함으로써 모두가 합심해 박스피를 만드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활력 잃은 코스피
코스피가 박스에 갇히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이렇다. 언제든 주식투자에 나설 수 있는 증시 대기 자금만 24조원에 달하는 등 머니마켓펀드(MMF)를 포함한 시중 단기 부동(浮動)자금이 작년 말 기준 930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1%대 초저금리가 지속된 결과다. 호재가 반짝 나타나면 주식시장에 돈이 재빨리 들어와 주가를 밀어올린다. 하지만 좀 올랐다 싶으면 불현듯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경제성장률과 통화가치 같은 거시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 상장 기업들의 미래 성장 동력 등에 대한 의문이 부각되면서 적당한 선에서 주식을 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종우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유럽 등 선진국도 펀더멘털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강한 QE(양적 완화) 정책이 주가를 밀어올렸다"고 우리 증시와의 차이점을 지적했다.증시가 오랜 기간 답보 상태를 이어가자, 주식형 펀드에 투자된 돈이 2008년 140조원에서 현재 78조70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이 돈은 채권형 펀드, 공모주 펀드, 환매조건부채권(RP) 같은 단기 투자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합심해 박스권에 가둬
5년 이상 이런 패턴이 이어지다 보니 투자자들은 이제 '지수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펀드매니저가 좋은 종목을 여럿 골라 담아 주가지수보다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액티브' 펀드가 정작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종목들을 순서대로 펀드에 쓸어담아 놓고 지수 수익률에 안주하는 사실상의 '패시브' 펀드로 변질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주가지수 상승률만큼의 수익은 낼 수 있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최근 1년 만에 ETF로 2조원가량이 몰린 것도 이런 점을 노린 것이다.
ELS(주가연계증권)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ELS는 특정 종목이나 주가지수의 움직임이 예상 범위에 있으면 약속한 수익을 주는 상품으로, ELS를 발행한 증권사들이 손실 위험을 분산(헤지)하기 위해 선물·옵션 거래를 하면서 주가의 추가 상승을 발목 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1~2년 새 벤치마크(코스피)와 완전히 동떨어져 움직이는 '벤치마크 무시(benchmark agnostic) 펀드'가 투자자들의 인기를 끄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수익률이 급격히 하락해 논란에 휩싸이고 있지만, 코스피 지수와 상관없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종목을 골라 담는다고 주장하는 메리츠자산운용의 '메리츠코리아' 펀드나 라자드코리아의 '라자드코리아' 펀드 등에 돈이 몰리는 것은 영혼 없는 지수 플레이에 염증을 느낀 투자자들의 '소리 없는 항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