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여, 안녕|로렌스 곤잘레스 지음|한진영 옮김|책세상|398쪽|1만6800원
1995년 서울, 삼풍|김정영·류진아·박현숙|최은영·홍세미 지음|동아시아|280쪽|1만6000원
뉴욕 시민 중에는 유독 청명한 가을 아침이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2001년 9·11 테러가 남긴 정신적 상흔(傷痕)이다. 무전병으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출신의 크리스 로렌스도 전역 이후 대형 마트에 장 보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지나치게 시끄럽고 밝은데다 갑자기 좌우 측면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불안감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참전 군인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후유증이다.
로렌스는 2007년 이라크에서 폭발 사고로 인해 오른쪽 뒤꿈치가 날아갔고 왼발 뼈가 으스러졌다. 당시 그의 몸은 10m 가까이 허공에 솟구쳤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곧바로 일어나 총을 들고 싸우려 했다. 해병대 훈련을 통해서 뿌리 깊숙이 박힌 무의식적 동작이었다. 간과 신장, 비장 같은 장기도 다쳤다. 이듬해 그는 결국 오른쪽 다리와 왼쪽 발의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의족을 달고 재활 의욕을 다지고 있지만, 여전히 단기 기억 손상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한 건, 대형 사고가 아니라 사고 이후의 일상이다. 전작(前作)인 '생존(Deep Survival)'에서 저자는 극한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필사적인 분투에 초점을 맞췄다. 후속편에 해당하는 이번 책에서는 생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좌절, 재활 의지를 다룬다. 그래서 책의 원제도 '생존을 견뎌내기(Surviving Survival)'다.
남편의 총격, 상어의 습격, 전이성 유방암 4기, 나치 수용소의 악몽을 겪은 생존자들의 수기(手記)와 인터뷰, 메모 등을 통해서 저자는 이들의 내면적 고통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살아남다(survive)'를 반복한 제목이 보여주듯, 등장 인물들은 끔찍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이후에도 끝없이 밀려오는 후유증과 맞서야 한다. 다양한 시점을 넘나드는 서술 방식 때문에 생존자의 육성을 바로 곁에서 듣는 것처럼 묘사가 생생하다.
생존자들은 여행과 골프, 공부와 업무, 뜨개질 같은 활동을 통해 내면 깊이 각인된 상처를 잊고자 애쓴다. 하지만 처절한 사투(死鬪)에서 모두가 승리하는 건 아니다. 1983년 캐나다 국립공원에서 곰에게 습격당한 주부 퍼트리샤 반 티검은 왼쪽 눈을 제거하고 유리 안구(眼球)를 넣는 안면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에도 그는 쌍둥이를 낳고 기르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2005년 그는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저자는 "그녀는 22년간 곰과 싸웠던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설령 죽음의 유혹을 이겨냈다고 해도, 상처와 후유증까지 깨끗하게 지워지지는 않는다. 2차 대전 당시 순양함 침몰 사고에서 살아남은 미 해군 병사들은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욕조에서 제대로 목욕조차 하지 못했다. 이라크전에서 폭발 사고를 겪은 병사들은 단기 기억 손상으로 하루 전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자고 말한다. 이 사고들을 관찰한 저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 삶은 기억이라는 지울 수 없는 잉크로 쓰인다는 것, 그리고 더 진한 잉크로 어두운 기억을 덮어 쓸 때만이 기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트라우마여, 안녕'이 대형 사고를 겪은 미국인들의 고통과 분투를 그렸다면, '1995년 서울, 삼풍'은 20여 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에 초점을 맞춘다. 서울문화재단의 구술 기록 프로젝트인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소속 작가들은 '서울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삼풍백화점 참사의 생존자와 유가족, 재난구호팀원과 의료진, 자원봉사자 등 100여 명을 2년간 인터뷰했다. 몸에 식용유를 들이붓고 콘크리트 더미 속으로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했던 소방서 구조대원, 장사를 접고 사고 현장에서 국을 끓이고 날랐던 자원봉사자들의 육성이 여전히 생생하다.
삼풍백화점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 되면 유가족들은 지금도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에 건립된 위령탑 앞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사고 이후에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현재적 시점에서 재구성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이들의 육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당시 참사로 큰딸을 잃은 어머니는 지금도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끔은 혼잣말을 하고 제대로 말을 마치지 못할 적도 있다. "오직 자식 죽은 것만 생각나고, 억울한 거 분한 거…." 마음의 상처란 이처럼 오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