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는 20여년 전 어느 날 박규원(62)씨가 어머니의 오래된 앨범 속에서 찾아낸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사진 속 낯선 남자는 송중기나 김수현보다 앞서 중국을 휩쓸었던 한국인 배우 김염. 그의 작은 외조부이자,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둘째 아들로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한 당대의 스타였다. 박씨는 어머니에게 '중국 아저씨'가 있다는 것은 듣고 자랐지만, 그가 중국에서 '영화황제'로까지 불린 명배우라는 것은 몰랐다. "중국이 '중공'으로 불렸던 시절, 중국 문화계의 고위급 인물이 집안 어른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평범한 주부였던 박씨는 무엇엔가 홀린 듯 그에게 빠져들었다. 님 웨일즈가 "그의 아름다운 육체 너머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았다"고 했던 청년 배우의 행적을 뒤좇아 '돗자리와 양산' 하나 들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걷다가 힘들면 앉아 쉬어야 했기 때문에 돗자리는 필수품이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박씨는 김염의 일대기를 그린 '상하이 올드데이즈'로 민음사 주최 2003년 논픽션 공모에서 대상(大賞)을 받는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민족의 불행한 시대와 개인의 갈등 구조를 시점과 인칭을 오가며 절묘하게 그렸다"고 평했다.
김염의 부인이자 중국 최고위급 배우 친이(秦怡·94), 극작가 선지(沈寂·92) 등 상하이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옛 이야기는 그 어느 영화보다 극적이었다. 어머니가 만주 용정에서 살던 시절, 온 가족이 김염이 나온 항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가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됐다. 그런데 그날 영화를 보러 갔던 사람들은 일본군에 몰살당하는 기막힌 일을 겪기도 했다. 그는 "내가 들은 이야기는 영화 '암살'이나 '색, 계'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며 "중국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작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토막잠 자며 글로 옮겨 본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안겨줬다. 바로 상하이와 상하이를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보는 것. 1930년대 상하이와 상하이 사람들의 삶은 그를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최근 나온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프리이코노미 라이프)는 바로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불과 몇십 년 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어요. 제 외조부의 삶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세기말 상하이 사람들의 삶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상하이는 1935년에 인구 350만 명의 대도시였고, 영화사만 100개에 달했던 최첨단 영화 도시였다. 영국·프랑스·일본·독일 등이 점령한 조차지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돈과 사람이 넘치다 보니 전 세계에서 일류(一流)들만 몰려들었고,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이곳까지 밀려와 구걸에 나선 러시아 귀족들도 거리에 많았다. 지난 2007년엔 그동안 수집한 이야기 20여 편을 모아 '불꽃 속의 나라'라는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박씨는 "중년이 지나 알게 된 상하이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됐고, 지금의 내 삶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