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근성과 성실함이 자산

손연재는 다섯 살 때 리듬체조에 입문했다. 집 근처 세종대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리듬체조 교실’에 나간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체육관을 찾았던 손연재는 “국가대표 언니들이 리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따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후 17년을 리듬체조에 빠져 지낼 줄은 그 스스로도 몰랐다. 균형 잡힌 몸매와 유연성을 타고난 손연재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국대회를 휩쓸며 두각을 보였다. 세종초 6학년 땐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되기도 했다.

손연재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건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개인 종합 동메달을 따면서부터다. 한국 리듬체조 사상 아시안게임 첫 개인전 메달이었다. 이후 손연재는 ‘최초’ 기록들을 잇따라 써내려갔다. 국제체조연맹(FIG) 리듬체조 월드컵 첫 메달(2012 펜자월드컵)과 올림픽 첫 결선 진출(2012 런던올림픽), 세계선수권 첫 메달(2014),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2014 인천아시안게임) 등 그가 지나온 길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한국 리듬체조에 새 길을 만들었다.

한땐 실력보다는 앳되고 귀여운 외모 때문에 더 주목을 받았다. ‘운동선수가 성적이 아니라 외모로 관심을 받으려 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다. 그는 2012 런던올림픽 후 인터뷰에서 “(그런 비판 여론이)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며 “‘선수 생활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연재는 국제 무대에서 꾸준한 성과를 올리며 스스로 ‘실력 논란’을 잠재웠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특유의 근성과 성실함이다. 초등학교 땐 오전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하루 7시간씩, 주 6일을 연습에 매진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코치가 고난도 기술을 못 해낸 손연재에게 ‘이 동작은 그냥 넘어가자’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며 6시간 동안 한 가지 기술만 연습해 기어이 성공한 적도 있다.

후회 없는 경기를 위하여

손연재는 2011년부턴 매년 가족도 친구도 없는 러시아에 홀로 건너가 훈련을 했다. 언어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타지(他地), 처음엔 텃새 때문에 매트 밖에서 눈치를 보며 연습을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세계 최강 러시아 선수들 틈에서 고된 훈련과 체중 감량을 독하게 버텨냈다. 손연재의 전담 코치 옐레나 니표도바는 “(손연재가) 생각이 깊고 어른스럽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참고 연습하는 근성을 갖고 있다”고 제자를 평가했다. 팬들도 그가 이런 열정으로 한 단계씩 성장해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리우올림픽은 손연재가 그 열정을 매트 위에서 보일 마지막 무대다. 그는 2012 런던올림픽에선 당시 동메달리스트에 불과 0.225점 차 뒤지며 5위에 머물렀다. 손연재는 최근 “올림픽 메달은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이다. 운동선수라면 당연히 목표를 높이 잡아야 한다”며 “나 역시 목표를 높이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경기를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실제로 그는 올림픽이 열리는 이번 시즌에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연기를 준비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종합에서 11위에 그치며 자존심을 구겼던 손연재는 대회 이후 절치부심하며 올림픽에 대비했다. 지난 1월 열린 국가대표 1차 선발전(태릉선수촌)에서 그 베일이 벗겨졌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손연재의 장기인 ‘포에테 피봇’(한쪽 다리를 들고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동작). 다리를 접고 회전하던 기존 동작(0.1 가점)이 아니라 다리를 편 채 도는 고난도 기술(0.2 가점)로 진화했다. 회전 수가 10번이라고 가정할 때, 기존 포에테 피봇으로 가점 1을 챙겼다면 이제는 2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연재는 새 프로그램을 짜면서 4개 종목(후프·볼·곤봉·리본) 모두에서 10번 내외의 포에테 피봇을 포함시켰다. 회전축이 되는 왼쪽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해 지난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포함한 근력 운동을 집중적으로 했다. 보통 리듬체조 선수들은 잘 하지 않는 훈련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손연재가 올림픽을 앞두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뛰어난 표현력을 요구하는 탱고 음악을 선택한 것도 그에겐 새로운 도전이다. 손연재는 리본 종목의 음악을 ‘리베르탱고(Libertango)’로 정했다. 그는 빠른 템포의 음악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전문 강사에게 따로 탱고 춤도 배웠다. 1분 30초 동안 쉼 없이 연결되는 댄싱 스텝과 수구 연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체력 훈련도 꾸준히 하고 있다.


'장수는 칼을 탓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올림픽 메달 전망은 밝다. 손연재는 지난 2월 열린 모스크바 그랑프리와 FIG 리듬체조 월드컵(에스포)에서 각각 메달 4개씩을 목에 걸며 올림픽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모스크바 대회에선 세계 최정상인 마르가리타 마문(21·러시아)을 꺾었다. 손연재는 이어 열린 리스본(3월)·페사로(4월) 월드컵에서 각각 개인 종합 4위에 머물렀지만, 종목별 결선에서 2~3개의 메달을 따내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과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고무적이다. 모스크바 대회 개인 종합에서 총점 72.964로 자신의 최고점 기록을 갈아치운 손연재는 에스포·페사로 월드컵에서 차례로 개인 종합 최고점을 세웠다.

종목별 ‘꿈의 점수’였던 18.500도 최근 대회에서 잇달아 뛰어넘었다. 새 프로그램이 몸에 익으며 점차 연기의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손연재는 리스본 월드컵 종목별 결선 후프 종목에서 러시아 선수의 후프를 빌려 경기에 출전했다. 훈련지인 모스크바에서 항공기를 타며 후프 2개(여분 포함)를 위탁 수하물로 부쳤는데, 항공사의 실수로 제때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전달받은 후프는 찌그러져 있어 경기에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신적으로 흔들릴 법한 상황이었지만 손연재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빌린 후프를 들고 연기하면서도 18.500의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 같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온라인에선 ‘장수(將帥)는 칼을 탓하지 않는다’ ‘빌린 수구로 메달을 따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을 위해 지난 5일 귀국한 손연재는 “(당시) 어쩔 수 없었다. 멘탈 트레이닝을 제대로 했다”며 위기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손연재는 앞으로 올림픽까지 월드컵과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수차례의 시험 무대를 남겨두고 있다. 한 달에 2~3차례 대회에 참가하는 강행군이지만 최종 무대에서 보다 완벽한 연기를 펼치기 위한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최초’가 붙은 기록을 수없이 만들어 온 손연재가 한국 리듬체조 ‘최초 올림픽 메달’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쓸 수 있을지, 벌써부터 팬들의 관심도 리우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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