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1월 ICC(국제상업회의소) 중재재판이 열린 싱가포르의 맥스웰 체임버스(Maxwell Chambers) 중재법정. 한국 기업이 일본의 화장품 업체 인수·합병(M&A)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회사가 '우리 주식을 너무 낮게 평가하려고 한다'며 국제중재를 요청한 사건이 올라왔다. 중재재판의 기준이 된 법은 일본법. 중재인 3명은 오스트리아, 호주, 일본 국적이었다.
한국 기업을 대리해 박은영 변호사 등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4명이 중재법정에 섰다. 일본 기업을 대리한 곳은 규모가 글로벌 1~2위를 다투는 미국의 공룡 로펌이었다.
2013년 시작된 사건에서 양측 대리인들은 2년 가까이 공방을 벌였다. 중재재판에서 김앤장은 "실사(實査)를 해보니 일본 기업이 우리 의뢰인 쪽에 회사 내부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며 "일본 기업이 한국 기업에 배상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박은영 변호사는 "모든 중재재판이 그렇듯이 당시 일주일 동안 우리나 미국 로펌이나 전력을 쏟아부었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중재인 3명이 내린 최종 결론이 양측에 통보됐다. '일본 기업은 한국 기업에 250억원을 배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기업은 주식 가격을 좀 더 받아내려고 국제중재를 요청했다가 오히려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된 것이다. 김앤장이 글로벌 공룡 로펌을 상대로 완승(完勝)을 거둔 순간이었다.
#2.
미국 상무부는 2013년 1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우리나라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한 세탁기에 대해 덤핑 판정을 내리고 9~13% 관세를 물렸다. 한국 가전제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자 미국 정부가 보호무역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미국 정부의 조치로 우리 기업들은 생산 물량 상당 부분을 제3국으로 이전해야 했고, 지금까지 7억달러 상당의 대미(對美) 수출이 감소했다.
우리 정부는 2013년 8월 '미국 상무부의 조치는 WTO(세계무역기구) 반덤핑 협정에 위반된다'며 WTO에 제소했다. 2년 반 만인 지난 3월 WTO 분쟁 해결 패널은 우리 정부 손을 들어줬다. 이 소송에서 우리 정부 자문역을 맡아 1차 승소를 이끈 곳은 법무법인 화우다. 그동안 우리 기업과 정부는 국제 무역 분쟁이 벌어지면 주로 외국 로펌에 조언을 구해왔는데 이번에 국내 로펌에 조언을 구한 것이다.
화우가 이번 소송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면서 우리 기업이 해외 비즈니스 과정에 벌어진 국제적 법률 분쟁에 국내 로펌이 참여하는 데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우는 포스코와 세아제강, 넥스틸에 대한 미 상무부의 상계관세 조사 사건, 캐나다 정부의 한국산 철근 콘크리트에 대한 상계관세 사건 등에서도 우리 정부를 대리해 국제무역 통상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입증했다.
국내 로펌이 글로벌 로펌으로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법률 시장 개방에 맞서 국내 시장을 수성(守城)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해외 법률 시장을 적극적으로 두드리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벌이는 무역전쟁의 우군(友軍)이 바로 국내 로펌들이다. 화우의 정진수 대표변호사는 "이젠 해외시장에서 돌파구를 찾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수년간에 걸친 투자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박은영 변호사는 "한국 로펌에 사건을 맡겨 본 국내외 기업들이 우리 로펌을 보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며 "이른바 '연안해군'에서 '대양해군'으로 발전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대형 로펌과 합작, 현지 사무소 설립을 통한 국내 로펌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기업의 해외 진출에 발맞춰 국내 로펌들도 전문성을 갖춘 변호사들을 여러 나라에 파견하고 있는 것이다.
법무법인 율촌은 작년 상반기 산업은행이 국내 금융 업계로선 처음으로 미국 오바마 정부의 '볼커룰(투기거래 규제 법률)'에 따라 프로그램을 구축할 때 뉴욕의 대형 로펌인 모리슨 앤드 포에스터와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또 국내 주요 조선업체와 세계 주요 탱커업체 간에 벌어진 2000억원대 소송에서도 국내 조선 업체를 대리해 영국에서 벌어진 소송과 런던 해사중재협회(LMAA) 중재사건을 맡고 있다. 율촌은 영국 현지 변호사들과 협업을 통해 손발을 맞춰가고 있다. 율촌 우창록 대표 변호사는 "글로벌 로펌의 고객 기업 사무를 돕고, 국내 우리 고객의 아웃바운드 소송에 협력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다"며 "지금은 외국 로펌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바른은 세계 최대 법률 시장인 미국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우선은 현지의 이 민1~2세대들이 주요 타깃이다. 바른의 미국 진출 교두보는 LA의 연락사무소가 될 전망이다. 김재호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전 세계 법률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 시장이고 한국보다 100배 큰 시장"이라며 "초기 시행착오는 불가피하겠지만, 현지 로펌과 사안별로 협업해 간다면 충분히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