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어떤 면에서 판사와 비슷하다. 여러 가지 증거와 주변 상황을 바탕으로 병을 판결(진단)하고 선고(치료)한다. 증거는 변하지 않지만 판결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약간씩 다를 수도 있다. 그 선고는 판결에 따라 가벼운 것일 수도 있고 무거운 것일 수도 있다. 의사의 판결도 항상 정답인 것만은 아니다. 병원의 이익 때문에 불필요한 검사를 하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엉뚱한 의료 행위를 해서 환자를 고통받게 하는 경우도 있고 치료 시기를 놓치기도 한다. 최근에는 실손보험에 가입한 환자들에게 실제 질병보다 과다한 검사와 치료를 권하는 병원이 많다는 보도도 있었다.

40대 남자가 의무 기록을 잔뜩 들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기록을 검토해 보니 쓸개에 혹이 생긴 담낭 용종이었다. 환자는 평소 아무런 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정기 건강검진에서 쓸개에 혹이 있다고 해서 매년 초음파 검사를 받아왔다. 올해는 초음파 검사 후 의사가 담낭을 떼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단다. 혹의 크기는 9㎜였고 작년에는 6㎜였다. 그전에는 더 작았다. 환자는 인터넷을 찾아보니 담낭이 없으면 여러 가지 소화기관에 장애가 생긴다는데 아직 1㎝ 도 안 되는 혹 때문에 담낭을 꼭 떼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술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지금 추세로 보면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이고 무엇보다 가족 중 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환자는 어쩌면 내가 과잉 치료를 권유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가족이라면 당연히 수술을 받게 할 것이다.

어떤 환자는 내시경에서 조기 위암으로 진단되었는데 병원에서 개복 수술을 하자고 했다며 요즘은 내시경 수술도 있다는데 개복 수술을 꼭 해야 하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허리가 아픈데, 무릎이 아픈데 수술을 해야 하느냐는 물음은 너무나도 자주 받는 단골 질문이다. 정답은 하나일 터인데 의사가 줄 수 있는 답은 제각각이다. 환자 중에는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다른 의사를 찾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의학이란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하나의 방향성을 보일 때 비로소 값어치를 갖는다. 지금 옳다고 생각한 치료법이 경험이 축적되며 다른 치료법으로 바뀌기도 한다. 언제나 예외라는 것이 있어 의사는 최선의 치료법 대신 차선의 방법을 쓸 수도 있다. 호미로 막아도 되는 것처럼 보여도 의사는 굳이 가래로 막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몇 년 전 유방암을 진단받은 환자가 진단한 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혹을 아무리 살펴봐도 암세포가 없었다. 진단한 병원에서 환자의 조직 표본이 바뀌어 암이 아닌데 암 수술을 받게 돼버린 것이다. 여러 단계를 거치며 여러 사람이 확인했는데도 조직 표본이 뒤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런 일이 생긴 뒤로 병원들은 환자가 병원을 옮길 때마다 검사와 진단을 다시 하는 경향이 생겼다.

의사의 판단을 의심해서 다시 진단을 받아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의사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뜻이니 고마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의사도 검사하다가 실수를 범할 수 있고 검사 결과를 환자에게 적용하는 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초를 다투는 경우가 아니라면 수술이라는 선고를 받고 고민하는 환자들이 재심을 고려해 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