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

그림책 작가 백희나(45)씨의 이촌동 작업실 벽에는 표어가 하나 붙어 있다. '계속 똑같이 만들 거라면, 아예 할 필요가 없다!'

A4용지에 색연필로 쓴 다짐이지만 강력한 인생관이었다. 30년 넘은 아파트에 둥지를 튼 작업실에는 작품 속 인형과 세트로 가득하다. '구름빵'의 홍비, '장수탕 선녀님'의 선녀, '달샤베트'의 아파트 미니어처, 그리고 신작 '이상한 엄마'의 초등생 호호까지.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빽빽하지만 같은 캐릭터, 같은 소품은 찾기 힘들다.

이번 신작 '이상한 엄마'(책읽는곰 출간)가 최근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베스트셀러 종합 2위에 올랐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지만 유아용 그림책이 이런 순위에 오른 것은 드문 일.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순위보다 작가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중이 백희나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데뷔작 '구름빵' 저작권의 곡절 많은 사연 때문.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 융성과 창조 경제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았지만, 출판사 주장으로 40만부 팔렸다는 책의 인세는 물론 제빵·애니메이션·뮤지컬 등 관련 산업으로 확장된 부가가치는 작가에게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무명 시절 '구름빵'을 850만원 매절(買切) 계약으로 출판사에 넘긴 탓이다. 하지만 저작권 논란에만 관심이 집중된 탓에 정작 이 작가의 차별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주목받지 못했다.

많은 그림책 작가와 달리 그의 작품은 그림과 글로 구성한 텍스트가 아니다. 먼저 이야기를 짠 뒤 영화처럼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캐릭터를 디자인해 찰흙 비슷한 재료인 스컬피(sculpy)로 주인공을 빚는다. 아파트와 소품 등 세트를 만들고, 주인공 인형을 각 장면에 배치해서 조명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는다. 소위 스톱모션(stopmotion) 애니메이션의 그림책 버전이랄까.

초등2 범준, 중1 홍비의 엄마인 그림책 작가 백희나. 자신이 신(神)으로 군림했던 이촌동 작업실에서, 이번에는 거꾸로 피사체가 됐다. 신작‘이상한 엄마’의 선녀와 엄마 등 자신이 직접 만든 캐릭터를 품에 안고서, 마치 촬영 현장의 한 장면처럼.

애니메이션은 여러 명이 분업·협업하지만 그는 혼자서 이 모든 작업을 구상하고 실행한다. 소설가·화가·조각가·건축가·사진가·조명감독. 르네상스인이라기보다 차라리 판타지 세계의 창조주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서 가끔 정말 통쾌해요"라며 시원하게 웃는다.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졸업한 뒤 애니메이션 전공으로 미국의 예술 명문 칼아츠(CalArts)를 한 번 더 졸업. 두 번의 졸업 사이에 자신 표현대로라면 '하자(瑕疵) 많은 사회생활'이 있다. 첫 졸업 후 입사한 유아용 멀티미디어 기업의 대리 시절 그는 융통성 없고 인간관계 허술한 회사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백 대리는 반문했다. "친구 사귀려고 회사 다니나요?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 즐거워할 작품 만드는 건데….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한데 왜 내게 화를 내죠?"

그는 "사회적 인간보다는 장인(匠人)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애니메이션은 1초에 24프레임이 필요하다. 겉보기의 화려함과 달리 무대 뒤의 반복 노동으로 쌓아올린 인내의 탑. 사람 대하는 일은 미숙했지만, 참을성이 미덕인 이 장르는 즐거웠다. 입체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 작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달걀 거품으로 구름을 만드는 '이상한 엄마'와 호호.

'구름빵'의 충격으로 국내에서는 7년 동안 새 책을 못 냈지만, 작가 백희나의 활약은 지금 국경을 넘어선다. 지난해 11월 중국에서 번역·출간된 '달샤베트'는 4개월 만에 2만5000부가 팔렸다. 상해도서전 작가 사인회에서 준비한 1100권이 반나절 만에 동나자 중국 출판사 사장은 미안해하면서도 추가로 1만장의 홍보용 엽서에 친필 사인을 요청했다. 1만이라는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하자 그는 "참고 견디는 건 자신 있다고 했잖아요"라며 웃었다. 오는 8월에는 일본에서 '장수탕 선녀님'이 출간된다.

'하자 많은 사회인'은 그림책 작가가 된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권선징악이 지배하던 어린 시절이 늘 그리웠다." 굳이 편법이나 모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정의가 승리하는 안전하고 꿈같은 세상.

지난 1월 길고 지루한 소송 끝에 법원은 '구름빵'에 대해 작가 백희나의 단독 저작권을 인정했다. 물론 금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지 '이름'을 돌려받은 것일 뿐. 하지만 "계속 똑같이 만들 거라면, 아예 할 필요가 없다"는 작가에겐 장인의 자존심이 더 소중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폴 아자르는 "그림책은 인류가 어린이에게 준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했다. 아픈 호호에게 나타나 계란국과 오므라이스를 차려주며 빨리 나으라고 호호 불어주는 백희나의 '엄마'. 현실에 지친 어른들도 따뜻하게 만드는, 위대하고 넉넉한 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