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이를 실용화하는 단계에서 집현전의 부제학인 최만리 등은 6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막는 상소를 올렸다. "집현전 학사가 한글에 반대하다니…." 세종은 대로했다. 최만리를 즉각 하옥하고 임금이 친국을 했다. 친국이라고 해도 고문이 아니라 토론 또는 설득의 자리였다. 최만리가 굽히지 않자 세종은 그를 풀어줬다. 그럼에도 최만리는 사직하고 낙향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최만리의 무례함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진언하자 세종은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 하여 새를 죽이려 함은 옳지 않다"며 그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최만리는 끝내 향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500년 전의 얘기다.
새삼 이 고사(古事)를 떠올리는 것은 유승민 공천 파동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세종이 말한 '새'는 오늘의 누구에 해당하는가? 유승민 의원일까, 김무성 대표일까?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일까? 또 이 고사의 주역(主役)은 누구인가? 세종인가, 최만리인가? 후세 사람들이 이 고사를 되새기는 것은 임금을 거스르는 최만리의 용기 못지않게 세종의 포용과 신하 사랑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 의원의 국회 재진입을 끝내 막을 것이며 또 무공천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인 김무성 대표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이제까지의 박 대통령 행보로 미루어볼 때 그러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타협을 택했다. 듣기 싫은 노래를 '배신'으로 여기며 '국민의 심판'을 요구했던 박 대통령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것은 박 대통령의 주목할 만한 변화이며 전환이다. 이것은 박 대통령을 위해서뿐 아니라 앞으로의 '타협 정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애당초 공천 게임에서 돋보이는 듯했던 김 대표의 '난(亂)'이나 유승민의 '헌법 1조'는 결국 박 대통령의 절충안 '수용'에 묻혀버린 셈이다.
만일 청와대와 친박이 이 대치 국면을 그냥 밀고 나갔다면 의석 몇 석을 얻고 잃는 문제가 아니라 총선 이후 새누리당의 분열이 불가피해졌을 것이며 이것은 박근혜 정부의 조기(早期) 레임덕과 직결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김 대표뿐 아니라 비박(非朴)이 정치 생명이 걸린 싸움으로 갈 경우, 새누리당은 유승민 등의 몇 석을 막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상황으로 변질됐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새누리당의 큰 폭의 승리이며 새누리당의 단합된 모습을 발판으로 한 국정의 원활한 수행이다. 당이 친박, 비박으로 갈려 주도권 싸움에 몰입하는 상황에서 결정적 피해를 보는 쪽은 '박근혜 정부'다.
지난 3년을 돌아볼 때 박 대통령의 문제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됐던 것은 그의 '소통'의 부재였다. 특히 인사에서, 대야(對野) 정치에서, 대국회 관계에서 박 대통령은 좋게 말해서 원칙을 지키고 신의를 중요시했다면 비판적으로 말해서 고집 세고 남의 말 듣지 않고 때론 오만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의 소통 부재를 수없이 지적했지만 그는 오불관언이었다.
아버지를 그의 '충실'했던 부하들에게 잃은 박 대통령으로서 배신의 정치에 강한 혐오감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상 그는 달라져야 했다. '배신'이 왜 그 주변에서 또 반복되는가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에게 '듣기 싫은 노랫소리'를 냈던 사람들이 지난날 그의 비서실장들이었고, 참모장들이었고, 측근들이었고, 대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의 인간관계 설정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 법이다. 어쩌면 정치판이 본래 그런 마당이라고 대범하게 넘기는 것도 정치지도자의 덕목이다.
오늘날 '박근혜 정치'를 떠메고 가는 '친박'도 조만간 그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순리다. 지금의 친박은 박 대통령과 정치의 시종(始終)을 같이하는 공동체, 친위대, 돌격대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뒤집어보면 박 이후(post 박)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 생명 유지와 정치 세력화를 위해 '박근혜 표(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봐야 한다(더불어민주당의 친노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지금의 친박이 영원한 호위무사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당의 단합이 필수적이라는 것, 단합하기 위해서는 포용력을 발휘하고 소통을 늘리는 것이다. 단언컨대 그러면 김무성은 물론이고 유승민 의원도 박 대통령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을 것이다. 노랫소리 듣기 싫다 하여 '새'를 죽이는 것은 상수(上手)가 아니다.
입력 2016.03.29. 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