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성과 잔인성이 공존하는 캐릭터
〈널 기다리며〉를 만든 모홍진 감독은 애초에 희주를 남자로 설정했다. 하지만 심은경(23)을 만난 뒤,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모 감독은 주인공 희주를 여자로 바꿨다. 모 감독은 영화 제작보고회에서 “남자 캐릭터라면 대결이 격하고 재밌을 것 같았지만 심은경이 연기한다면 남과 다른 느낌의 스릴러가 나올 수 있겠다는 확신을 줬다”라고 말했다. 〈널 기다리며〉는 〈수상한 그녀〉 이후 심은경이 2년 만에 출연하는 영화다. 2년 만에 그의 볼은 홀쭉해졌고, 눈빛은 차분해졌다. 말을 할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어졌다. 소녀보다는 여자에 더 가까워졌다. 심은경은 “스릴러 장르에 관심이 많아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보던 중 〈널 기다리며〉 속 희주 캐릭터가 기존에 봐왔던 캐릭터와는 다른 오묘한 매력이 있어 선택하게 됐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면과 동시에 복수심에 차 있고 내면에 괴물이 존재하는 잔인성이 공존하는 캐릭터여서 끌렸다”고 했다.
“희주는 다른 영화를 준비할 때보다 고민이 많이 됐어요. 오히려 영화를 들어가기 전에는 이 캐릭터를 쉽게 이해했었는데 막상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죠. 희주 안에는 철학적 메시지도 담겨 있고, 실제로 희주의 입에서 그런 대사들이 나오고, 순수함과 잔인함 양극단의 모습이 공존하면서 대사도 문어체였어요. ‘어떻게 내가 튀지 않고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게 잘 이입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가 어려운 숙제였어요.
이 영화는 여리고 착했던 아이가 아버지가 살해당한 상처 때문에 뒤틀려버렸고, 그래서 ‘이 아이는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예요. 영화 전체가 보여야 나도 보이고 다른 배우들도 보이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가장 중요했어요.”
희주는 기범을 처단하기 위해서 15년을 기다린다. 그는 “신이 없기 때문에 괴물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돼버린 것이다. 또래보다 어눌한 그는 평소엔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듯 그렁그렁한 눈을 품고 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눈에 광기가 스쳐간다. 심은경은 희주를 연기하면서 “딱 두 가지만 봤다. 순수성과 잔인성”이라고 했다.
“기존에 봐왔던 캐릭터와는 다른 순수성과 잔인성이 공존했죠. 그것도 극단적으로. 개인적으로 내면의 아우라를 만들고 싶어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누르고 냉정하게 연기했어요. 동시에 공감되길 바랐죠. 영화 〈렛미인〉에서 오스칼과 엘리의 사랑이 징그럽거나 혐오스럽지 않잖아요. 공감하고 동정했기 때문이죠. 희주도 그렇게 다가갔으면 했어요. 물론 힘들었죠. 사실 〈수상한 그녀〉에서 할머니의 마음은 엄마를 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근데 희주는 더 크고 복잡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많은 걸 참고하지는 않았어요. 복잡하고 난해한 캐릭터를 보고 느끼는 그대로 표현했죠. 희주를 보면서 혼란스럽고 이상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아마 희주도 이런 기분일 듯했거든요. 그래서 그 감정을 그대로 연기했죠. 15년 동안 악을 품고 살아온 친구에게 그런 격분의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건 정상인의 범주겠죠. 꼭 복수해야 하니까, 냉정하고 침착하게 자기가 할 것을 하는 캐릭터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수상한 그녀〉의 성공이 불러온 혼란
올해 스물셋인 심은경은 이미 연기 경력 13년 차다. 2004년부터 그는 TV에서 ‘리틀’ 명세빈(〈결혼하고 싶은 여자〉), ‘리틀’ 최강희(〈단팥빵〉), ‘리틀’ 하지원(〈황진이〉), ‘리틀’ 이지아(〈태왕사신기〉)처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2007)로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2009)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연기하면서 말 그대로 ‘(연기) 신들린 아이’로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강형철 감독의 〈써니〉로 그는 아역배우에서 벗어나 주연배우로 자리잡는다. 순수하고 씩씩한 전학생 임나미 역을 맡아 서울말과 전라도 사투리가 어설프게 뒤섞인 화법을 맛깔나게 구사하는 그녀가 없었다면, 눈을 희번덕이거나 막춤을 추며 제대로 망가지는 그녀가 없었다면, 〈써니〉는 훨씬 밋밋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 이후 그는 유학을 다녀온 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수상한 그녀〉(2014)에 연이어 출연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을 하면서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고 보는 배우’란 별칭을 얻게 됐다. 특히 〈수상한 그녀〉는 그가 단독 주연을 맡다시피 한 영화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아가씨(이지만 알고 보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남자는 처자식 안 굶기고 밤일만 잘하면 되여”라고 능청스레 말하는데, 웃지 않고선 당해낼 도리가 없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갓 스물이 된 심은경에게 그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는 “그때 당시 흥행에 연이어 성공해서 붙은 수식어라 너무 좋았다. 그러곤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작품을 성공시키고 연기를 잘해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자만했던 것 같다. 연기에 대한 본질을 너무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난 행복하지 않았다. 성공만 생각하고 연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계처럼 연기했다.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갈등이 많았다.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거듭 고민했다. 이 고민은 지금도 하고 있다”고 했다.
“(주연작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많이 느껴요. 그래서 더 담담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언론 시사회 때나 무대 인사 때 ‘제가 메인 포스터에 걸릴 만큼 좋은 연기를 펼쳤는지 모르겠고 아직 부족하다’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제 심정이 정말 그렇거든요. 영화 〈수상한 그녀〉 이후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사실 들떴었고, 어느 순간 무분별해지더라고요. 인기와 관심의 정도를 떠나 배우로서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작품이 계속 잘되고 주위에서 좋은 소리만 듣다 보니, 점점 ‘연기 이런 걸 떠나서 나는 다 잘돼야 한다. 내가 하는 작품은 무조건 성공해야 돼’ 라는 것에 꽂혀 있었어요. 그 와중에 시행착오를 겪게 됐고 그걸 통해 자신감도 많이 잃게 됐어요. 나는 항상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왜 이런 말들을 듣는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어떻게 연기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분들이 제게 느끼셨을 생각과 감정들을 스스로에게 느꼈고, 많이 안타까웠어요”
심은경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일본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를 한국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내일도 칸타빌레〉다. 늘 칭찬만 듣던 심은경에게 혹평과 흥행 실패라는 뼈아픈 결과를 남겨준 작품이다. 그는 “맞다. 힘들었다. 숨기고 싶지 않다. 정말 힘들었으니까. 연기적으로 혼란도 많았고, 방영 이후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실패가 가르쳐준 것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그게 결국 약이 되더라고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칭찬만 들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다 제가 어려서 했던 생각이더라고요. ‘사람들은 〈내일도 칸타빌레〉를 평생 내 흑역사로 떠올리겠지, 날 따라다니겠지, 독이 되겠지’라며 걱정했는데, 전혀요. 늘 칭찬만 듣고 혹평은 회피하고 싶었던 제게 약이 된 작품이에요. 물론 요즘도 〈수상한 그녀〉로 뜬 심은경이 〈내일도 칸타빌레〉로 망했단 얘기가 있지만 괜찮아요. 제가 연기를 못했던 게 맞아요.”
그는 얼마 전 일본에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떠난 것은 처음이다. 〈써니〉 전까지 그는 연기를 할 때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했고, 광해 때만 해도 촬영장에 어머니가 함께 했다. 심은경이 아역 배우를 시작할 때부터 3년 전 회사에 소속되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의 매니저이자 운전기사, 스타일리스트였고 연기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의 하얀 피부와 동그란 눈은 어머니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 그는 “또래보다 먼저 사회에서 경험한 부분은 있겠지만 반대로 나 자신이 어떤 취미를 좋아하고 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이제야 혼자 여행도 다녀보면서 나를 발견하고 있다” 고 말했다.
“요새는 다른 걸 찾고 있어요. 연기자 심은경 말고 제가 저로서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두 달 전엔 여행도 다니면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혼자 여행하면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해요. 혼자서 지하철도 타러 다니고 짐도 정리하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구나, 나 혼자서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구나, 여러 가지를 깨달았어요.”
심은경은 이번 작품이 개봉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영화의 개봉과 촬영 일정을 앞두고 있다. 〈걷기왕〉에서는 다시 교복을 입고 경보하는 여고생을 연기한다. 곧 있을 첫 촬영을 위해 경보 연습도 시작했다. 그는 “마음 편하게 연기만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게 됐다.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꼭 연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특별시민〉에선 〈걷기왕〉과 달리 본격적인 성인 연기를 한다. “존경하는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 출연하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앞으로 〈궁합〉을 통해 멜로 연기도 선보일 예정이다. 하반기에 개봉 예정이다.
“처음 연기했던 시절엔 너무 행복했고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기에 대한 본질을 잊고 지낸 것 같아요. 제가 연기를 즐기고, 연기하면서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앞선 일들을 이 작품으로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다 얼마 전부터 많이 내려놓게 됐어요. 제가 관객분들께 한 번쯤 보여주고 싶었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의미가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작품이 잘 되면 좋겠지만, 이전만큼 집착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냥 ‘심은경의 또 다른 모습을 봤다’ 정도만 느껴주셔도 저에겐 큰 의미가 될 것 같아요.”
그는 며칠 전에 고경표, 안재홍, 류덕환을 만나 술을 마신 이야기를 꺼냈다.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인터뷰하면서 처음으로 스물세 살로 보인 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주연과 흥행을 경험하면서 그는 또래보다 어깨에 많은 짐을 지고 있었고,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데 익숙해 보였다. 친구들과 논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는 목소리를 높여 재잘거렸다.
“친남매처럼 지내는 오빠들인데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 가졌던 고민들을 털어놨고 조언도 해줬어요. 최근 들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오빠들과 이야기하면서 문득, 앞으론 나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동안은 저만 생각하기 바빴던 것 같아요. 사실 아직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라서 알아가는 중이거든요. 연기자 심은경이 아닌 그냥 심은경이 좋아하는 걸 찾으려고 하는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