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게 진짜 이중섭 황소야? 이 작은 게 그렇게 비싸?"
유리 사이에 특수 부착한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보고 등산복 차림 중년 여성이 탄성을 지른다. "좋지요? 소 한 마리 몰고 가실래요? 허허." 곁에서 넉살 좋게 농담 건네는 이 남자. 30년 넘게 이중섭에 미쳐 작품 사 모으고, 그 작품을 위해 미술관(서울미술관)까지 연 안병광(59) 유니온약품 회장이다. 지금 소장한 이중섭 그림은 19점. 개인으로선 최대 규모다. 여기엔 이중섭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소(1953년경)', '환희(1955년)' 등이 포함돼 있다.
"내 생일은 깜빡깜빡하는데 이중섭 생일은 안 잊어요. 1916년 9월 16일. 마누라는 이중섭하고 연애하느냐, 질투 아닌 질투 합니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이중섭을 신처럼 모시는 안 회장에겐 특별한 해다. 2년 전부터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전시를 준비했다. 16일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시작한 '이중섭은 죽었다'전이다. 이중섭의 유화와 드로잉 총 18점(1점 대여)과 레플리카(복제품) 2점이 전시됐다.
제목이 도발적이다. "위작 시비다 뭐다, 과대평가 됐다는 둥 이중섭을 우리 스스로 죽였어요. 우리가 죽인 이중섭을 다시 살리자는 얘기인 거죠. 이 두 작품이 그 취지를 보여주고요." 그가 나란히 걸린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복제품), '통영 앞바다'(대여) 사이에 섰다. 2005년 위작 파문 이후 가격이 곤두박질칠 때 작가 위상을 다시 높이자는 한 화상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매에 내놓은 그림이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은 침대맡에 걸어뒀던 그림이었어요. 집사람이 미국에 가 있을 때 몰래 내놓았지요. 인쇄한 복제품을 대신 걸어놓고. 나중에 집사람이 청소하다 액자 뒤를 보는 바람에 탄로 났지만(웃음)."
이중섭과의 만남은 극적이다. 1983년 제약사 영업사원 시절이었다. 007 가방 들고 돌아다니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한 곳이 명동성당 맞은편 액자 가게 처마 밑이었다. 진열대 액자에 꽂힌 소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보고 있으니 소가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미술의 미음도 모르는 문외한이 영업사원 일비 9000원 중 7000원을 털어 '그림'을 샀다. 싱글벙글 뒤돌아 가는 길, 가게 주인이 말했다. "그거 진짜 그림 아닌 거 알죠? 그림 찍은 사진이에요. 진짜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한 채 팔아야 살걸?" 그가 그림인 줄 알고 산 건 이중섭의 '황소'를 찍은 사진이었다. "집사람한테 호언장담했죠. 두고 보라고, 꼭 사고 말 거라고." 돈을 모으는 대로 이중섭 그림을 샀다. 2010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7년 만에 진짜 황소 주인이 됐다. 당시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이 그림을 낙찰받았다.
"미술관을 준비할 때라 황소 그림 살 자금이 없었어요. 경매 전 옥션 회사에 사정해 딱 하루만 빌려 집에서 하룻밤 끼고 잤어요. 경매 당일엔 혹시 '사고' 칠까 휴대전화도 꺼놨어요. 그런데 결국 가지고 있던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을 내놓고 '황소'를 가져오고 말았어요."
영화 같은 일은 또 있었다. "'황소'를 팔고 '길 떠나는 가족'을 사간 분이 원래 그 작품 주인이었다고 해요. 1950년대에 '길 떠나는 가족'을 샀는데 며칠 뒤 이중섭이 왔더래요. '일본 간 가족 줄 그림이어서 안 파는 건데 착오가 생겼다'며 '황소' 그림을 대신 주고 바꿔갔대요."
이번 전시는 이중섭이 묻힌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출발해, 통영, 제주, 도쿄 문화학원 시절 등 시대별로 10개 구역으로 나눠 이중섭의 삶을 역추적한다. "지난해 야마모토 마사코(96·이중섭 부인) 여사가 미술관에 와 한참을 서럽게 우셨지요. 한평생 가족을 그리다 쓸쓸히 간 한 인간의 애틋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전시 5월 29일까지. 문의 (02)395-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