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패 후 1승을 하니까 이렇게 기쁠 수 없군요. 앞으로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정말 값어치 있는 1승입니다." 승리 인터뷰에 나선 이세돌(33) 9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18번이나 세계 정상에 섰을 때도 볼 수 없었던 안도의 표정이 얼굴 전체를 덮었다. 당초 장담했던 것과 거꾸로 알파고에 연패를 거듭하면서 쏟아졌던 비난은 천하의 '센돌'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 사이 한국 관계자들과 마주칠 때마다 이세돌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곤 했다. 이세돌이 겪었던 마음고생을 옆에서 지켜봐 온 가족들도 이날 회견에서 이세돌이 쏟아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목이 메었다.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오른쪽)이 대국 종료 후 이세돌 9단을 찾아 축하 인사를 건네는 장면. 브린은 “흥미진진한 대국에 감사한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서 마지막 대국을 꼭 보겠다”고 말했다.

[한국 바둑의 자존심, 이세돌 9단은 누구?]

3국을 져 알파고의 우승이 결정된 12일은 하필 이세돌·김현진 동갑내기 부부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파티는 열리지 않았다. 아내 김씨는 "세돌씨가 우승 좌절이란 큰 아픔 속에서도 기념일을 기억하고 손을 꼭 잡아주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다음 주말로 예정된 제주도 가족 여행 때 축하 케이크를 자르자는 말을 나누고 있을 때 방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호텔 직원의 손엔 봄 냄새를 함빡 머금은 꽃과 예쁜 라벨의 샴페인, 그리고 축하 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세돌 9단의 결혼 10주년을 축하하며 두 분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는 글 밑에 데미스 허사비스 알파고 CEO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잠시 뒤엔 친누나 이세나(38·월간 바둑 편집장)씨가 방문을 노크했다. "위로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어요." 이세돌은 평소와 다름 없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딸(혜림·10)과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누나를 향해 "내일은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세돌은 이번 대결 기간 초반 세 판을 두는 동안 거의 밤잠을 못 이뤘다. 완승을 다짐하다가 거꾸로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익숙지 않은 상황에 굉장히 힘들어했다. 마주 앉은 상대가 사람 아닌 기계라는 것, 그 기이한 괴물에 연패를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특히 세계 3관왕이자 자신의 천적이기도 한 중국 커제(柯潔)가 "처참하게 패한 이세돌은 인류 대표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그의 충격은 극에 달했다.

"잠깐 잠들었다 깰 때마다 베란다에 혼자 앉아 바둑판 위로 한숨을 토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세돌씨가 가족들한테 힘들다는 내색을 하는 적은 평소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없었어요. 한 10년 살다 보니 눈치로 다 느끼게 됐지만…. 특히 혜림이에겐 어두운 얼굴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고합니다." 아내 김씨의 얘기다.

3국서 패해 우승이 날아간 뒤 가진 회견에서 이세돌의 첫 마디는 "무력한 모습을 보여 드려 너무 죄송하다"였다. 그리고 "기사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심한 압박감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세돌을 향한 팬들의 반향은 바로 이날 패배가 확정되면서부터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인간을 대표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모습에 감동한 것이다.

4국이 한창 중반을 넘어가던 13일 오후 3시 무렵 이세돌의 친형 이상훈(41)씨와 형수 박지이(37)씨가 대국장에 도착했다. 역시 프로기사인 이상훈 9단이 모니터를 살피더니 함성을 내지른다. "오늘은 무조건 이기는 형세입니다. 그런데 어제 나와 약속했던 작전 그대로 두고 있어요." 전날 이세돌과의 통화에서 "알파고에 큰 모양을 내주고 그 안에서 타개하는 작전을 펼 것"을 권했는데 그 전략이 적중했다는 얘기였다. 충남 당진에서 교사로 활동 중인 형수는 "선생님들께 들려줄 얘기가 많아졌다"며 동서를 얼싸안았다.

이세돌은 4국 기자회견을 마친 뒤 딸 혜림양의 손을 잡고 숙소로 향했다. '인류 대표'라는 무거운 짐은 이제 벗어부치고 내일의 마지막 한 판을 다짐하는 힘찬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