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한 아파트 관리 통장에선 2011~2014년 사이 20억원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 통장을 관리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통장에서 인출된 20억원의 사용 내역을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의 회계감사 결과 이 20억원 중 3억7000만원은 관리소장 개인 계좌로 이체됐고, 2억4000만원은 36차례에 걸쳐 현금으로 인출됐다. 이 외에도 12억3000만원이 아파트 관리 업무와 관련 없는 계좌로 넘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낸 관리비 20억원이 합당한 지출 증빙 자료 하나 없이 어디론가 새나간 것이다.
국무조정실 정부 합동 부패척결추진단이 지난해부터 국토교통부, 지방자치단체, 경찰청 등과 합동으로 전국 300가구 이상 아파트 8319개 단지의 외부 회계감사 실태를 점검한 결과 전국 아파트 5곳 중 1곳은 회계 부정 등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10일 밝혀졌다.
입주민들의 감시가 없는 틈을 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동 대표, 관리사무소장 등이 아파트 관리비를 제멋대로 쓰고 있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우리 국민의 70%는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고, 그에 따른 연간 관리비는 총 12조원에 이른다.
◇5곳 중 1곳꼴로 회계 처리 부실
점검 대상 아파트의 19.4%에 이르는 1610개 단지의 회계 처리가 부실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상장 기업의 회계 부실 비율(1% 내외)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다.
서울은 1128개 대상 단지 중 311개(27.6%) 단지가 회계 부적합 단지로 나타나 전국 도시 가운데 회계 투명성이 가장 낮았다. 도별로는 강원도의 부적합 단지 비율이 36.8%로 가장 높았다.
부적합 사유는 현금 흐름표를 작성하지 않아 관리비 흐름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43.9%, 회계 항목 분류 잘못 등 부적절한 회계 처리가 18.2%였다. 경북의 한 아파트는 통장에 남은 관리비가 장부상의 잔액에 비해 1억2000만원이나 적었다. 서울의 한 아파트 관리 회사는 관리비 통장에서 자금을 무단 인출했다가 월말에 다시 돈을 입금하는 식으로 5억원을 무단 유용한 사실이 적발됐다. 이병철 경기대 교수(회계세무학)는 "관리소장이나 동 대표 등이 회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식의 핑계를 대면서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며 "아파트 회계감사에 대한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입주자 대표·관리소장 등 비리 만연
비리도 만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토부와 전국 17개 지방자치단체가 외부 회계감사와 별도로 작년 10월부터 3개월간 전국 429개 단지에 대해 실시한 합동 감사에서는 312개 단지(72%)에서 1255건의 각종 비리가 적발됐다. 승강기 교체나 도색 등의 공사와 관련한 비리가 189건,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등 관리비 집행 분야 비리가 416건, 기타 비리가 650건이었다.
경찰청이 작년 11월부터 100일간 실시한 특별 단속에서도 관리비 횡령이나 공사 뒷돈 수수 등의 비리를 저지른 153명이 입건됐다. 입건 대상의 76.7%는 입주자대표회장이나 관리소장 등이었다.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 동 대표 윤모(51)씨는 "주민 공동 시설 내에 피트니스 시설을 운영하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도 안모(65) 전 입주자대표회장 등 12명이 각 가구의 현관 LED 센서 등을 교체하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업체로부터 1140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입건된 일이 있었다. 시민단체 아파트비리척결본부 송주열 대표는 "1000가구 규모 이상의 단지는 배관 공사를 하면 15억~20억원 정도가 드는데, 이런 돈을 부풀려 뒷돈을 챙기는 입주자 대표들이 많다"고 했다.
◇"입주민, 지속적인 관심 가져야"
정부는 아파트 비리 근절을 위해 지자체, 경찰 등과 협업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지자체는 외부 회계감사를 토대로 수시로 문제가 되는 아파트를 감시하고, 국토부는 비리 적발 내용과 통계를 관리하며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단속을 벌이는 방식이다. 또 아파트 주민들이 감사 결과와 관리비 내역, 주택관리업자의 처벌 이력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공동주택 관리시스템(K-apt)'도 개선하기로 했다.
서정호 국토부 주택건설공급과장은 "공사 뒷돈 등 외부 회계감사에 걸리지 않는 비리를 적발하기 위해서는 입주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