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엔터테인먼트 역사에서 튀어나온 박재범이라는 야사(野史)"
"버려진 아이돌에서 가장 트렌디한 힙합 레이블 CEO로 변신"
"박진영과의 비교는 농구 선수와 야구 선수를 대결 시키는 것"
"아이돌 가수 키우지 않고, 음악 PD 접대 안하겠다"

서른 살 CEO 박재범의 천진난만한 모습. 그는 한국 메이저 음악계가 낳은 성공적인 ‘돌연변이'다

지난 1월 CJ E&M은 박재범이 2013년 만든 힙합 레이블 AOMG에 전략적 투자를 결정했다. CJ E&M 음악사업부는 “최근 가장 트렌디한 힙합 레이블인 AOMG가 음악 뿐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를 선도하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프라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JYP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시작해서, 2008년부터 1년 간의 짧은 아이돌 생활을 했던 박재범. 연습생 시절 한국 생활에 대한 불만을 SNS에 올렸던 게 문제가 돼, 소속 그룹 2PM에서 퇴출, 고향인 시애틀 자동차 정비소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추락했던 소년이, 6년 만에 누구도 무시 못 할 존재로 음악 시장에 우뚝 섰다.

자이언트 베이비.

2010년 시애틀에 있던 그를 발탁했던 사이더스 iHQ 정훈탁 사장이 박재범에게 붙인 별명이다. SM, YG, JYP로 대표되던 한국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역사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박재범이라는 야사(野史)는 그래서 흥미롭다.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 최상훈 기자는 케이팝에 관한 기사에서 “박재범이 2010년 이래로 미국, 캐나다, 덴마크 아이튠스 알앤비/소울 차트 1위를 기록한” 사실을 언급하며, “박재범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하나의 홍보 회사이며, TV 네트워크”라고 평가한 바 있다.

TV 네트워크.

이제까지 ‘타고난 나'라는 자연스러운 본성보다 ‘시장이 원하는 나'를 만들기 위한 매니지먼트의 교육 시스템은 기록적인 스피드로 케이팝과 한류의 영광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아이돌이 고개 들어 ‘인권 선언'을 하는 순간, 판타지는 깨지고 가수와 매니지먼트 ‘사장님’과의 관계는 틀어진다.

부양 의무를 호환하는 유사 가족 관계에, 음악적인 피를 잇는 사제 관계, 저항하기 힘든 노사 관계까지 겹쳐진 이 복잡한 관계에 금이 가는 순간, 더 크게 타격을 받는 쪽은 아이돌이다. 방송 출연은 물론 음악 시상식 등 각종 캐스팅에서 배제되며 TV 활동 영역은 위축된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박재범이라는 ‘돌연변이'가 스스로 TV 네트워크가 되어 장애물 경기를 하듯 ‘유유히' 성장해온 것이다.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불후의 명곡'이나,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 ‘복면 가왕'에서 조차도 그는 ‘박재범'으로 빛났다. 남을 흉내 내거나, 시기하지 않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스웩(Swag 힙합 용어로 ‘멋지다, 내가 최고다’라는 의미)에 몸을 맡기고.

팬이 선물해준 맥북으로 유튜브에 올린 노래 한 곡이 이틀 만에 2백만 뷰를 돌파하며, 다시 음악 세상으로 나왔다는 걸 잊지 않는 박재범.

워싱턴에서 태어나 시애틀에서 자란 박재범은 비보이 세계대회에 나가는 게 유일한 꿈이었다.

아이돌을 꿈꾼 적이 없었기에, 정상에서 내려온 뒤의 시간이 오히려 더 평화로웠다는 이 청년은, 이제 자의든 타의든 대형 매니지먼트가 지배하는 음악 시장에 자기 힘으로 ‘스타트업'을 시작한 독립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2015년 한국대중음악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부문 상을 받았으며, 최근 발표한 앨범 수록곡 ‘월드와이드' ‘몸매' 등은 자유자재로 금기를 넘어서는 박재범 스타일의 절정이라고 평가받는다.

해맑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서른 살 CEO 박재범을 만났다. AOMG 전국 순회 콘서트를 마친 직후였다. “박진영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농구선수와 야구 선수를 비교하는 격"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사장으로서 자신은 소속 아티스트를 통해 돈 벌지 않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흰 얼굴을 제외한 살은 온통 문신으로 화려했고, 며칠 후엔 뒷머리 전체에 천사 문신을 새길 거라고 했다.

-루이뷔통 벨트에 롤렉스 시계를 찼군요. 퍼프 대디에게서 럭셔리의 피를 이어받은 ‘도끼’처럼, 당신도 럭셔리 힙합으로 가고 있는 건가요?

“도끼는 바닥부터 시작해서 지금 위치까지 왔고, 롤스로이스나 롤렉스는 성공했다는 효과를 보여줘요. 남들도 그걸 보고 자극을 받으라는 메시지죠. “도끼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힙합은 자기 안의 솔직한 욕망과 열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매력이죠.

저도 시계 하나 사는 데 큰 돈을 썼어요. 보기에도 화려해 보이고, 재밌죠. 한창 많이 사다가 지금은 자제하고 있습니다(웃음).”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차이는 뭔가요?

“나이는 상관없어요(웃음). 아이돌은 회사에서 만들어주는 이미지로 돈을 벌고, 뮤직뱅크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는 음악을 만들어요. 아티스트는 자기 앨범의 비전이 있고, 자기 음악을 하는 존재지요.”

-최근 CJ E&M에서 2013년 당신이 세운 힙합 레이블 AOMG 전략적 출자를 결정했습니다. 회사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사이더스 소속으로 3년 계약이 끝나고 나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음악적인 색깔로 보면 아메바 컬처(자이언티 소속사)나 YG 엔터테인먼트가 맞았는데, YG는 양현석 대표가 케이팝스타 심사위원을 하니까 안될 거로 생각했죠. 그러던 차에 생각을 바꿨어요. 꼭 어디에 소속되지 않아도 내가 회사를 차리면 되지 않을까.”

-아이돌 출신이 음악 스타트업을 시작할 용기를 냈군요.

“제작도 하고, 뮤직비디오도 디렉팅하고, 노래도 쓰고, 안무도 하니까, 만들어서 유통만 시키면 되는 거죠. 마음 맞는 뮤지션들을 찾아서 제안했고, 사이먼 디, 그레이, 로꼬, DJ펌킨, 어글리덕, DJ웨건 등이 합류했어요. 친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어요.”

과거의 부자유한 상활을 기억하면, CJ가 천 억원을 준다해도 지분을 전부 넘기지는 않겠다고 한다.

-말을 하면서도 무척 흥겨워 보입니다.

“2010년부터 억지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다 이루어졌어요. 예전엔 “꿈이 뭐냐? 어떤 가수가 되고 싶냐?” 그런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 1년을 살다 보니 내가 뭘 결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일하면서 점점 뚜렷해져요. 내가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알게된 거죠. AOMG도 3년 전에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가고 있어요.”

-초기 투자금은 얼마였습니까?

“2억 원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저희는 아이돌 가수를 키울 것도 아니고, 방송국 PD들 대접할 것도 아니니까요. 방송하면 좋지만, 방송을 위해서 음악을 하지 않으니, 딱 음악에만 포커스를 맞췄어요.”

-JYP와의 불화로 방송 출구가 많이 막혔다는 소문이 있어요.

“정확히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방송 출연이 안 된다고 해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어요. 방송 출연이 안 된 적은 많았지만, 크게 속상해하지 않고 저는 계속 움직여요. 오히려 다른 쪽으로 더 잘 풀리게 돼요.”

"내 예전 쌤이 우리 same same 될까 봐, 지금 샘내고 있지,
가요계랑 동떨어져 있는데, 내 현재 위치는 I get bitches and the riches…
항상 미소 짓지, 넌 팬 장사하는 방송인, 날 막아도 계속 직진해 워…"

-당신이 예전에 쓴 노랫말을 들으면, 특정인이 은근히 연상되는데요. 실제로 어떤 의도가 있습니까?

“(웃으며)가사는 당시에 맘에 있는 걸 써요. 해석은 듣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할 수 있죠. (웃으며) 사람들은 저와 이전 회사 대표를 붙이고 싶어 하죠. 그런데 전 책임질 사람이 많아요. 내 할 일을 하느라 바빠요(웃음).”

-박진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분과 저는 붙여서 생각할 수 없어요. 농구 선수와 야구 선수를 대결시키는 격이죠(웃음). 말이 안 돼요. 2005년~2009년까지 엄청나게 힘들었던 시절이에요. 하지만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강해지지 못했을 거예요.”

-예전과 많이 달라져 보입니다.

“저는 달라진 게 없어요. 이런저런 일들이 이루어진 거죠.”

-어릴 때 꿈은 뭐였죠?

“유일한 꿈은 내 친구 비보이들과 비보잉 세계 대회에 나가는 거였어요. 당시에 전 어셔를 좋아했는데, 어셔가 어떤 인터뷰에서 “여자에게 인기를 끌려면 복근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13살 때부터 복근 운동을 했어요.”

-비보이 세계대회는 나갔나요?

“아니요(웃음). 그만큼 실력이 안 됐어요. 대신 엄마가 때마침 시애틀에 온 JYP 오디션에 나가길 원하셔서 나갔어요. 엄마의 꿈은 제가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제가 공부도 안 하고 춤과 랩에 빠져있으니까, 이참에 아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고 싶어 하셨죠.”

-당신이 원했던 건 아니었고요?

“전 크게 흥미가 없었어요. 오디션 당일 날 무대에서 제가 쓴 랩과 춤을 보여준 다음엔 결과도 안보고 타코를 먹으러 갔는걸요. 타코벨에 앉아있는데, 엄마가 “JYP 관계자가 널 보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가요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담당 이사가 ‘아이돌'이니 ‘연습생'이니 설명을 해도 개념을 이해 못했어요.”

-어쨌거나 JYP와 박재범의 인연이 시작된 거군요.

“시애틀 오디션을 보고도 큰 변화는 없었어요. 엄마랑 대학교 갈 거냐 말 거냐로 승강이를 벌이며 하루하루를 보냈죠. 2004년 즈음, 박진영 프로듀서가 LA에 왔을 때, 다시 오디션을 봤어요. “비와 GOD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JYP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제가 새로 만들 아이돌 그룹의 랩을 맡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스타가 될 거라는 예감이 오던가요?

“아니요. “일단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했어요. 말씀드렸듯이 전 스타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시애틀에서의 삶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요. 다만 당시에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웠어요. “돈 갚으라"는 전화가 매일 집에 걸려오던 차라, 그걸 해결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철부지 같은 생각이었는데, 1년 동안 활동해서 바짝 돈 벌면, 다시 부모님과 친구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한국 생활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겠군요.

"음… 일단 연습생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까요(웃음). 말이 안 통하고 음식이 안 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미국에선 자유롭게 했던 춤과 랩을 억압적으로 욕먹으면서 배우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눈치를 안 보고 살다가, 순간순간 눈치를 봐야 해서 주눅이 많이 들었죠. 지금은 눈물이 없지만, 그때는 매일매일 울었어요."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까?

“네.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요.”

-소셜 네트워크에 그 기분을 여과 없이 올린 걸 후회하나요?

“제 마음이 좁고 소심했을 때 한 실수예요. 당시에 저는 페이스북 계정도 없었고, 2005년은 소셜 네트워크가 그렇게 폭발적일 때도 아니었죠. 마이 스페이스라고 미국 친구들과 소통하려고 만든 계정이었는데, 글을 올린 후 4년이 지나서 사건이 터졌죠.”

십 대 시절 함께 했던 비보이 친구들과의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박재범.

-2PM의 멤버로는 얼마나 활동을 했나요?

“2008년 9월부터 2009년 9월까지 딱 1년을 했어요. 그리고 사건이 터진 후, 혼자가 됐죠(웃음).”

-기분이 어땠나요?

“모두에게 욕먹고 쫓겨나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한편으로 마음이 편했어요. 다 잊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타이어 가게 아르바이트하면 되겠구나 했어요. 익숙한 세계,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구나.”

-비참한 기분보다 안도감이 들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제가 꿈꾸던 길이 아니었거든요. 다만 나를 응원해준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게 힘들었어요. 부모님이 속상해하시는 것도 괴로웠죠. 하지만 실수를 통해 또 배우는 게 삶이잖아요.”

-어쨌든 한창 잘 나가던 그룹 2PM이 리더였던 박재범을 퇴출한 그 사건은 음악 시장에서 꽤 충격이었습니다. JYP의 수장인 박진영, 2PM, 그리고 박재범 모두에게 그 여파가 꽤 컸던 걸로 압니다.

“저는 다 잊고 제 삶을 살 준비를 했는데, 오히려 언론이 일종의 ‘드라마'로 대립 상황을 진행했다고 봐요. 저는 정말 다시 연예인을 안 해도 괜찮았어요(웃음).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고 비보이 배틀도 나가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어요.”

-유튜브에 B.O.B의 히트곡 ‘Nothing on you’를 부른 걸 올리고, 그 동영상이 이틀 만에 2백만 뷰를 넘으면서, 재도약의 계기가 됐습니다. 예상했나요?

“아니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유튜브를 활용한 건 아니에요. 팬들이 옷, 신발, 맥북 같은 선물을 미국의 집으로 보내주셨는데, 그 보답으로 ‘제가 잘 지낸다'는 연락을 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은 무척 반대하셨죠. 그래도 전 팬이 선물한 맥북으로 그렇게 안부를 전한 거예요.”

-‘완전체’로 유지되는 아이돌 그룹에 균열이 생긴 첫 사례고, 어쨌거나 그걸 해결하는 JYP의 대응 방식은 팬들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어요. 유튜브의 반응이 당신을 향한 사랑의 에너지인지, 분노의 에너지인지 혼동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는 1년 동안 아이돌 멤버로 활동하면서 큰 사랑을 받았어요. 내가 어떤 음악을 하는 지, 어떤 기질을 가진 아티스트인지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회사가 시킨 대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사랑을 받았죠. 그런 아이돌은 계속 나올 테지만, 저는 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더 좋은 아티스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론적으로 저는 팬들이 싫어해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요.”

-팬들에게 사랑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팬들이 싫어해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겠다? 그 역설이 재미있군요.

“어린 시절 시애틀에서 같이 춤추던 흑인 친구 ‘차차'와 같이 음악을 만들고, 래퍼 ‘도끼'와도 ‘스윙스'와도 즐겁게 작업을 했어요. 제가 방송에 나오지 않아서 뭘 하는지 모르는 분이 많으실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자유로운 작업을 쌓아가면서, M.net ‘쇼미더머니'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자연스럽게 인정도 받고, 힙합 레이블 AOMG도 만들게 된 거죠.”

“저는 음악 차트 멜론 1위 안 해도 돼요. 당장 대중성이 없어도 가고 싶은 대로 가요.”

-그 전에 미국에서 돌아와서 tvN의 야심작인 SNL 코리아에 참여한 것은 정말 의외였어요. 돌아온 아이돌 스타가 19禁 성인 코미디 라이브쇼에 고정 크루로 참여한 건 신선한 발상이었어요. 엉덩이를 ‘까는' 모습 등 B급 코드의 야한 농담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더군요.

“미국 SNL을 정말 좋아했어요. 단발 호스트로 참여하려고 했는데, 신동엽 형이 고정 크루를 제안했어요. 방송은 보통 말조심하고 눈치 봐야 하는데, SNL은 그런 제약이 없어서 정말 신이 났어요. 다들 이 정도 야한 얘기는 해도 돼, 욕 좀 먹으면 어때… 에너지가 자유로웠어요.”

-그 뒤부터 SNL에 아이돌이 줄줄이 출연했죠?

“네. 아이돌이 하면 안 된다고 여겼던 것들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됐죠. 가령 ‘퍽, 쉣’ 이런 욕들도요(웃음).”

-애완 인형으로 소비됐던 아이돌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에, 박재범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타투도 그 일환인가요? 보기에 좀 과하다 싶습니다만(웃음).

“팬들한테 욕 좀 먹었죠(웃음). 그래도 제 몸인 걸요. 제가 타투하고 야한 얘기 한다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요. 처음엔 욕을 좀 먹더라도 일단 시작해요.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제한되는 건 재미없잖아요. 아티스트한테 ‘이런 그림만 그려'라고 하면, 창의성이 죽어요. 영혼이 죽어요. 저는 음악 차트 멜론 1위 안 해도 돼요. 당장 대중성이 없어도 가고 싶은 대로 가요.”

-이번에 발표한 앨범 중 ‘몸매'는 19禁을 표방한 뮤직비디오로도 유명해요. 섹시한 척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부류도 있는데, 당신은 타고난 섹시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더군요.

“어릴 때부터 힙합과 R&B를 듣고 자랐어요. ‘싼 티'나는 것과 섹시한 것은 뮤지션이 어떻게 느끼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저는 어셔와 보이스투멘 음악을 듣고 자라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요.”

-서른인데도,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여전해요. 그래선지 야해도 탁해 보이지 않아요.

“섹시와 변태의 차이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과 포르노의 차이예요. 경계가 애매한 듯하지만, 확실히 다르죠.”

-CJ는 AOMG에 어느 정도 관여하나요?

“경영은 제가 자유롭게 하고 있어요. CJ는 비즈니스에 관한 기술적인 조언을 해주죠. 일단 저는 AOMG가 2년 만에 힙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레이블이 된 게 정말 좋아요. 무명이던 그레이와 로꼬가 스타가 된 것도 행복하죠. 앞으로도 늙은 저보다(웃음), 젊은 친구들이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AOMG의 CEO로서 그는 소속 아티스트를 통해 자기가 돈 벌지 않겠다고 한다.

-어릴 때 꿈이 크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점점 커지고 있나요?

“꿈이 점점 선명해져요. 유튜브에 음악을 올린 이후 엄청난 관심을 받았고, 공연이 들어왔고, 공연을 위해서 음악을 만들었고, 음악을 위해 앨범을 만들고, 동료 뮤지션들과 회사를 만들고… 그렇게 2010년에는 R&B만 할 줄 알았는데, 점점 더 기량을 닦으면서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만약 그때 시애틀에서 유튜브에 음악을 올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또 달라졌겠죠?

“그렇죠. 다들 저와 무언가를 같이 하면 위험해진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이틀 만에 200만 명이 보니까, 리스크를 안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거죠.”

-사이더스 iHQ의 정훈탁 대표가 처음 손을 내밀었죠? 그는 당신을 '자이언트 베이비'라고 하더군요.

“제의는 여기저기서 있었어요. 정훈탁 대표에게 감사해요. 저한테 억지로 뭘 시킨 적이 없죠. 비지니스맨인데도 날 이해하고 보호하고 발전할 기회를 줬어요.”

-귀 뒤에 타투로 새긴 AOMG는 무슨 뜻인가요?

“처음엔 십 대 때 같이 활동했던 비보이 크루 Art Of Movement 였어요. 지금은 새로운 힙합 레이블 Above Ordinary Music Group의 약자로 AOMG를 써요. 보통 사람한테는 그냥 알파벳이겠지만, 제겐 어릴 때부터 같이 춤추던 친구들과의 의리를 상징하죠.”

-2PM과는 연락하고 지내나요?

“아니요. 가는 길이 뚜렷하게 다르니까요. 일본에서 잘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 결코 남이 망하길 바라지 않아요(웃음). 트와이스도 응원하고 있어요. 쯔위 화이팅(웃음)!”

-당신의 가장 큰 재능은 무엇인가요?

“열정이요. 저는 항상 무언가를 했어요. 남들이 생각만 하고 말거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포기할 때도, 저는 그냥 했어요. 억지로 아니고 즐기면서요(웃음).”

“누구나 실수를 해요.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게 중요한 거죠.”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없이 행복하다는 박재범.

-2005년의 한국과 2016년의 한국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웃으며)그때는 너무 어려서 비행기 타는 것도 큰일이었죠. 한국이 다른 세상 같았어요. 지금 한국은 내가 음악 하는 터전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사랑하는 가족들도 함께 살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박재범은 어떤 사장인가요?

“저는 제가 알아서 돈 벌어요. 아티스트를 통해서 돈 벌지 않아요.”

-CJ가 온전히 AOMG 인수를 제의한다면요?

“천 억 원을 줘도 포기할 수 없어요. 저는 옛날에 그걸 느껴봤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