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과총) 50년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선출된 김명자(72)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 1일 인터뷰를 앞두고 이메일 여섯 통을 기자에게 보냈다. 인터뷰 나흘 전 도착한 첫 이메일엔 과총 회장 수락 연설문, 이력서, 언론 기사 등 문서가 16개 들어 있었다. 신문에 기고한 칼럼, 사진 자료 등 이메일 두 통이 인터뷰 전날까지 더 도착했다. 나머지 이메일 세 통은 인터뷰 당일 급습하듯 왔다. 인터뷰 두 시간 전에 '인터뷰에 참고할 만한 종합 자료의 일부'라며 한 통이 왔다. 과학 전문지와의 대담 등 문서 8개가 첨부돼 있었다. 몇 분 후 '추가 자료'라며 이메일 두 통이 더 왔다. 친지들이 쓴 김명자 론(論) 7편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성실하고 치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정보를 최선을 다해 줬으니 이제 당신이 정확하게 쓰는 일만 남았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인터뷰는 서울 역삼동 과총회관에서 있었다. 경직된 '철(鐵)의 여인'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맵시 곱고 온화한 인상이었다. 일흔을 넘겼는데도 공들여 화장하고 자주색 립스틱을 발랐다. 진주귀고리와 목걸이가 단정했다. 감색 재킷에는 푸른 줄 무늬의 흰 칼라가 달려 있었다. "장관 시절부터 15년 넘게 입고 있는 옷이에요. 이런 칼라가 달린 스타일을 제일 좋아하죠." 그가 말문을 열었다.
과총 50년 역사상 첫 여성 회장
'김명자'라는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여성 장관(1999년 6월~2003년 2월)이다. 2004~2007년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관이 되기 전엔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였다. 대표적인 국내 원자력 전문가로도 꼽힌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고 지난달 26일 과총 제 19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내년 3월부터 3년간 과총을 이끈다. 과총은 과학기술 분야 학회 400여개, 공공단체 약 120개, 민간기업 30개, 민간기업 부설연구소 약 80개 등이 모인 국내 대표 과학 단체다. 김명자는 "언필칭 '과학기술인 500만명의 총본산'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따져봐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과총이라는 명칭이 대중에겐 낯설다.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1966년 설립됐을 땐 학술 활동 진흥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과학기술인의 사회 참여를 촉진하고 국가 정책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도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설립 목적엔 변함이 없다. 요즘은 과학기술인 사기 진작과 복지 증진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과총 출범 50년 만의 첫 여성 회장이다. 어떤 책임감을 느끼나.
"과학기술계 여성 인력 비중이 매우 낮다. 정규직으로 치자면 15%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최근 바이오 분야가 상당히 각광받고 있다. 여성 진출 비율이 타 분야에 비해 높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열세로 여겨지던 수학 같은 분야에서도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변화 덕에 과학기술 분야 여성 숫자가 점점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 분야는 훈련과 교육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투자가 필요하다. 키워놓은 인력을 여성이라 해서 사장(死藏)시키던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과학기술계 여성 인력 비중이 낮은 것은 여성이 과학기술 분야에 걸맞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출산·육아 등으로 중도 포기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인가.
"요즘 학부에서는 과학기술을 전공하는 남녀 학생 수가 엇비슷하다. 그런데 석·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여성 비율이 점점 준다. 파이프라인을 따라 물이 줄줄 새는 것에 빗대 '물 새는 파이프라인(leaky pipeline)'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학위를 따고 취업을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여성이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다 보면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기가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커리어 사다리에서 뒤처지게 되고 다음엔 유리천장에 부딪힌다."
회장 선거권을 가진 과총 이사는 모두 90명. 그중 여성은 15명이다. 김명자는 지난달 16일 열린 과총 이사회에서 유효 투표 83표 중 60표를 얻었다. 과총 회장 도전은 지난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한 달 반 동안 이사들에게 40통이 넘는 이메일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다"고 말했다.
―'이메일 선거운동'을 한 이유가 있나.
"술 마시며 뭉치는 남성 특유의 네트워킹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다른 방식의 스킨십을 택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회장이 되면 무엇을 할지 근거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19대 과총 회장 출마'라는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는 스팸메일로 처리되고 일부는 휴지통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를 다 읽는 분도 계실 것이고, 40여통 중 2~3통이라도 읽는 분이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편지로 설득하는 장관
‘편지를 통한 설득’은 김명자의 장기(長技)다. 환경부 장관 시절 낙동강·금강·영산강 ‘3대강 물관리 특별법’을 둘러싸고 개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정부와 지역 낙후를 우려한 주민 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주민들이 장관 허수아비를 놓고 화형식까지 치렀다. 이 사태를 주민 2만4000여명에게 일일이 “특별법이 통과돼야 물을 살릴 수 있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내 해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편지를 고수하는 건 진심이 결국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진심이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건 (노력을) 덜 했기 때문이다. 장관 시절 직원들에게 ‘마음으로 통하라’고 강조했다. 크고 작은 일 모두가 다 마음이 시키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일하면 성과가 나쁘더라도 받아들이기가 쉽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 짧은 길을 오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하셨다. 그 말에 동의한다.”
―DJ 정부에서 3년 8개월간 환경부 장관을 지내며 ‘헌정 최장수 여성 장관’ 기록을 세웠다. 비결은.
“굳이 이야기한다면 내 임무에만 충실했다. ‘이렇게 하면 다음엔 어떻게 되겠지’라는 계산은 내 머릿속엔 없다. 그리고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나 혼자 뛰어나다고 일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함께하도록 이끌어내는 게 일을 잘하는 거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인사 덕에 직원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하던데.
“외부의 ‘줄’을 타고 인사를 하던 관행을 내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면서 바로잡았다. 공정한 인사를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다. 그게 조직 질서를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건 틀림없는 것 같다.”
2000년 7월 환경부 간부가 출입기자단과의 식사 자리에서 술에 취해 “사실 우리 아키코상은 미인”이라며 “우리 마누라와 동갑인데도 아키코상은 아직도 곱다”고 말했다. ‘아키코’는 ‘명자(明子)’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 간부는 또 동석한 여기자들에게 “여자가 안경을 쓰면 지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여성으로서 매력은 50% 이상 뚝 떨어지니 벗고 다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간부로부터 사표를 받았다.
“나는 사실 처음엔 ‘아키코’ 이야기는 몰랐다. 공보관으로부터 여기자를 비하한 이야기만 보고받았다. 다음 날 신문에 보도가 됐는데 아침부터 여성단체 등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그 사람을 인사 조치한 뒤 각 언론사 논설위원 간담회에 갔더니 남성 위원들이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느냐’고 묻더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좀 더 나았다고 판단했다’고 답했다.”
―그런 행정 감각은 타고난 건가.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망설이다가 일이 터지고 속수무책으로 터지는 상황을 굉장히 경계하는 편이다. 선제적 대응이 내 원칙이었다.”
“목표를 세우고 인생 살지 않았다”
김명자는 1남 5녀의 맏이다.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였던 아버지는 맏딸을 무척 아꼈다. 김명자는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점잖은 분이었는데 내가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가면 무척 기뻐하셨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전공 선택에도 아버지가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미국 예일대 교환교수로 계실 때 보니 ‘자연계가 유망하다’ 해서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한 거다. 어릴 때 커다란 책가방을 들고 가끔 집에 오는 대학원생들을 보면서 ‘나도 이다음에 공부를 많이 해 저런 가방을 들고 다녀야지’ 생각했다. 그게 내 학문적 허영의 시작이었다(웃음).”
―서울대 화학과에 진학했다.
“처음엔 의사가 될까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 사람 목숨을 맡으며 살 자신이 없더라. 이 고민 저 고민 하다 화학을 택했다.”
―미국 버지니아대에서 유학했다. 여자가 유학 가는 건 흔치 않던 시절 아닌가.
“서울대 이과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구소련이 1957년 스푸트니크호를 쏘아올리자 자극을 받은 미국에서 과학교육 혁명이 일어났다. 내가 1966년 대학을 졸업했는데 과학기술 혁명 분위기 덕에 미국 대학이 아시아 이공계 인력을 장학금 주며 끌어오는 분위기였다.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여비는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받아서 갔다.”
김명자는 캠퍼스 커플이던 남편과 결혼해 1967년 함께 유학 갔다. 1996년 그는 30년 가까운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그는 “10년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다 내린 선택이다. 이혼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지만 상대를 입에 올리는 게 조심스러워 누가 뭐라고 하든 노코멘트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나는 보수적인 모범생이다. 그런 일을 겪자 인생이 점점 나빠질 거라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는 바닥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999년 장관 제의가 왔다. 청와대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내가 좀 복잡합니다’였다. 그랬더니 ‘우리도 다 알아보고 하는 거다. 염려할 것 없다’ 하더라.”
―장관 임명 당시 남편 직업을 묻는 기자 질문에 ‘무직’이라고 해서 논란이 됐다.
“당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부군(夫君) 직업이 뭐냐’고 묻길래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해당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무직이란다’ 이렇게 된 거다. 의사소통이 잘못된 건데 이혼 사실을 숨겼다는 오해를 받았다. 곧 들통날 사실을 왜 굳이 속이겠나. 당시 공보관이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 하길래 초짜 장관으로 그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일이 커졌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실험실의 연구자’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과 저술을 많이 했다.
“나는 진정한 과학자는 못 되고 ‘유사 과학자’다(웃음). 과학사를 오래 가르쳤다. 1974년 숙명여대 교수가 됐는데 이미 아이가 셋이었다. 외며느리였는데 시부모님이 오랫동안 편찮으셨다. 실험실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 입원해 계신 병원을 6개월간 꼬박 드나드는데 갈등이 오는 거다. 박사 학위라고 받아 왔는데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다. 미국의 일하는 엄마들이 커리어에서 겪는 갈등을 모아놓은 책을 번역해 ‘여성과 사회참여’라는 제목으로 숙대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왜 번역이었나.
“집에서 아이들 돌보며 짬짬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예전에 번역했던 원서를 보니 우리 아이가 자기랑 놀자며 볼펜으로 막 그어놓았던 흔적이 있더라. 첫 번역서를 내고 나니 비로소 마음의 안정이 왔다. 그때부터 미친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교자상에 삐딱하게 앉아 연필로 원고지에 번역을 했다. 나중엔 몸에 무리가 왔다.”
1981년 5월 8일자 조선일보는 ‘여성 응접실’이라는 코너에서 ‘8개월 동안 책 4권 펴낸 이학박사 김명자씨’를 소개한다. ‘여성과 사회참여’를 비롯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197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 등을 번역하고 화장품과 피부미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향장(香粧)의 상식’을 저술했다는 내용이다.
―번역과 저술은 당신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나.
“위안을 찾았다. 실험실과 학교에서 몸은 벗어나 있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 그런데 그렇게 책을 낸 것이 계기가 돼 신문사에서 칼럼을 써 달라는 제의가 왔다. 칼럼을 쓰고 TV에 출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정부에서 과학 정책과 과학기술 관련 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했다. YS 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을 맡았는데 DJ 때 유임이 됐다. 자문위원 자격으로 보고를 하곤 했으니 대통령이 나를 알았다. 그러다가 손숙 장관 물러난 후 내가 장관이 됐다.”
―교수, 장관, 국회의원을 거쳐 이제는 과총 회장까지 맡았다. 대단히 화려한 이력이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일, 할 수 있는 일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일 욕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인생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그렇게 하면 깨끗하다.”
‘완벽주의자’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김명자는 “그러지 않으면 내가 불편하다. 지금도 시간 약속에 좀 늦는다 싶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생겨먹은 게 그렇다 보니, 내가 편하려고 그렇게 사는 것일 뿐이다”고 말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천성이 그의 관운(官運)을 일궈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