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는 '해산물계의 신데렐라' 같은 존재이다. 요즘처럼 어족(魚族)이 씨가 마르기 전, 그러니까 아직은 바다가 풍성하고 갯벌이 오염되지 않았던 1970~80년대만 해도 주꾸미는 상품(商品)으로 유통되지 않았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춘궁기 서해 바닷가 사람들이 허기질 때나 먹는 천덕꾸러기였다. 어부들이 돈 되는 낙지는 잡았지만 주꾸미는 바다에 도로 던져 넣을 정도였다.
상황은 1990년대 급변했다. 낙지 서식처인 서해 연안 갯벌이 오염되자 낙지 가격이 치솟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비교적 저렴한 주꾸미에 젓가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낙지 대신 주꾸미'였다. 주꾸미는 천덕꾸러기 미운 오리새끼에서 아름다운 백조로 거듭났다.
◇부드럽고 연한 웰빙식품
주꾸미는 낙지와 비슷하지만 다리가 짧고 머리는 2~3배 크다. 식감은 둘 다 부드럽지만 낙지는 여기에 쫄깃함이 추가된 반면 주꾸미는 연하다. 낙지가 껌 같은 식감이라면, 주꾸미는 밀가루 반죽 같달까. 여기에 낙지는 감칠맛이 더 있지만 주꾸미는 담백한 편이다.
주꾸미나 낙지나 열량이 낮고 지방이 적은 웰빙 다이어트 식품이란 공통점은 있다. 주꾸미는 먹을 수 있는 부위 100g당 열량이 52㎉, 지방은 0.5g에 불과하다. 반면 철분을 풍부하게 함유해 빈혈 예방에 효과적이다. 타우린 함량은 1597㎎으로 연체류 중에서 가장 높다. 타우린은 간의 작용을 돕고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해 정력을 증강시키고 시력 보호, 콜레스테롤 수치 저하, 근육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다. 두뇌 발달과 성인병 예방에 좋은 불포화지방산과 DHA가 함유돼 성장기 아동부터 성인까지 두루 좋다. 먹물은 항암은 물론 위액 분비 촉진을 돕는다니, 버리지 말고 먹어야겠다.
◇산지에선 제철… 서울은 아직 귀해
수온이 높아지는 여름을 제외하면 모든 계절에 맛볼 수 있지만, '봄 주꾸미, 가을 낙지(또는 전어)'란 말이 있듯 주꾸미는 3~5월 봄에 맛이 절정에 오른다. 살이 더욱 쫄깃하고 감칠맛이 진해진다. 특히 5월 산란기를 앞두고 흔히 '머리'라고 착각하는 몸통에 가득 차는 알이 별미다. 이 알을 '찹쌀'이라고도 부른다. 데치면 희고 반투명한 모양새와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영락없는 찹쌀이다.
주꾸미 산지와 서울은 아직 물량 차이가 많다. 주꾸미 주요 집하장 중 하나인 충남 보령 대천항수산물시장에서는 주꾸미가 제철에 들어섰다. 이 시장에서 1일 현재 주꾸미 소매가가 생물 1㎏당 3만2000원, 냉동 2만원이다. 당연히 가격은 그날그날 공급과 수요에 따라 달라진다. 시장 상인은 "그래도 아직은 날이 추워 주꾸미 물량이 적다"면서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더 많이 나오고 가격도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울 마포농수산물시장은 1일 현재 국내산 주꾸미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중국산만 판매하고 있었는데, 살아 있는 주꾸미가 1㎏당 2만3000원, 죽은 주꾸미가 1만8000원이었다. 영풍수산 사장 조승갑씨는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 초부터 국내산이 들어올 것 같다"고 말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면 신선
주꾸미를 고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눈으로 외모를 살피는 것이다. 물 좋은 주꾸미는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을 띤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하얗게 변한다. 또 눈이 반짝거리면 싱싱한 주꾸미라고 판단해도 좋다. 더 확실하게 선도(鮮度)를 판별하려면 손으로 만져본다. 표면이 너무 미끌거리면 잡힌 지 오래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능하면 살아 있는 주꾸미를 고른다.
주꾸미 손질은 어렵지 않다. 머리를 뒤집어 내장과 먹통을 떼어낸 다음 굵은 소금으로 주무르듯 씻으면 거품이 많이 나고 까만 물이 나온다.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살아 있는 주꾸미라면 굳이 손질할 필요도 없다.
날로도 즐겨 먹는 낙지와 달리, 주꾸미는 익혀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맑은 육수에 데쳐서 샤부샤부로 먹거나 매콤달콤하게 양념해 구이나 볶음으로 주로 즐긴다. 짧은 시간 재빨리 조리한다. 열을 조금만 가해도 오그라들고 질겨진다. 볶을 때 물이 나와 맛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살짝 데친 다음 볶아야 더 맛있다.
볶거나 찌거나 굽거나… '봄 주꾸미' 맛집
봄 주꾸미를 가장 빨리 가장 싱싱하게 맛보는 방법은 산지로 가는 것이다. 충남 보령과 서천은 주꾸미의 메카로 꼽힌다. 보령 대천항수산시장(041-931-1230)은 주꾸미를 비롯한 각종 수산물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1층 가게에서 구입한 제철 해산물을 2층 식당가로 가지고 올라간다. 회, 매운탕, 구이, 찜, 탕, 샤부샤부, 볶음 등 손님이 고르는 대로 요리해준다. 흔히 '쓰키다시'라고 하는 각종 밑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가격을 낮췄다. 1㎏ 기준으로 받는데, 요리법과 관계없이 모두 2인 이하 1㎏당 1만원, 3인 이상 8000원이다. 보령시 관광과 (041)930-3541, ubtour.go.kr
서천 마량항 일대에서는 3월 21일부터 4월 3일까지 '서천 동백꽃 주꾸미축제'가 열린다. 동백도 보고 주꾸미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곳 서산회관(041-951-7677)은 주꾸미로 서해안 일대에서 이름난 식당. 특히 볶음에 자신감을 보인다. 샤부샤부도 괜찮다. 볶음과 샤부샤부 각 4만, 5만, 6만원짜리가 있다. 주꾸미를 직접 잡아 먹겠다면 오천항(041-932-4301)으로 간다. 보령에 있는 이 작은 포구는 주꾸미 낚시로 유명하다. 서천군 생태관광과 (041)950-4256, tour.seocheon.go.kr
주꾸미 인기가 높다 보니 서울은 물론 전국 주요 도시마다 맛집이 꽤 있다. 서대문경찰서 맞은편 골목 안에 있는 삼오쭈꾸미(02-362-2120)는 너무 맵지도 달지도 않으면서 주꾸미 자체의 맛을 살려내는 양념 솜씨가 25년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老鋪)답다. 구멍이 난 불판에 구워준다. 얼큰하지만 텁텁하지 않게 끓여내는 주꾸미 전골도 훌륭하다.
목포집나정순할매쭈꾸미(02-2279-0803)는 동대문구 용두동 주꾸미골목 원조로 꼽힌다. 필동 충무로역 근처 충무로쭈꾸미불고기는 양념한 주꾸미를 숯불에 구워준다. 주꾸미와 함께 키조개가 나오는 모둠으로 시키는 편이 낫다. 홍대 앞(정확하게는 동교동) 교동집(02-337-3663)은 고추장 양념한 주꾸미를 철판에 구워주는데, 삼겹살과 함께 구우면 돼지기름이 주꾸미에 배어들어 더 맛있다.
부산 중구 중앙동 주꾸미골목 실비집(051-245-6806)은 연탄불에 구워주는 부드러운 주꾸미와 시원한 대구탕이 이름났다. 인천 부평구 오구당당은 논우렁쌈밥으로 유명한 집이나 주꾸미볶음도 잘한다. 인천 동구 할머니쭈꾸미집은 50년 역사를 자랑한다. 울산 남구 남해꽃게탕(052-276-0576)은 상호에 내세운 꽃게탕보다 주꾸미로 더 유명하다. 소금만으로 간을 한 '주꾸미 소금구이'라는 다른 식당에 없는 메뉴가 눈길을 끈다. 경기도 김포 구래리 그집(031-981-7111)은 새우튀김도 잘한다.
입안 가득한 봄의 향… 통영바다 그대로 담은 '맑은 생선탕'
통영의 맛, 봄국
식도락 즐긴다는 이들은 이맘때면 경남 통영 쪽을 쳐다본다. '도다리쑥국을 언제 맛보러 갈까' 생각하면서. 그만큼 도다리쑥국은 봄을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 통영 바다 풍광과 사라져가는 통영 음식의 원형을 기록하고 있는 이상희씨는 "통영에서는 봄이면 생선을 가지고 끓여 먹는 국이 다양하다"며 "도다리쑥국은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충남 세종시(옛 조치원) 출신으로 음식을 공부하던 이씨는 식재료를 보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해산물이 엄청나게 많아 놀랐고, 약 25년 전인 1980년대 말 통영에 정착해 살게 됐다"고 했다. 이씨가 이맘때 남쪽 바다에서 생선으로 끓이는 맑은 국 네 가지와 이를 잘하는 오래된 식당들을 소개했다.
[立春 알리는 別味… 도다리 아닌 과메기·미역·꿩고기 넣기도]
◇향긋한 도다리쑥국
한려수도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 곳곳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해쑥은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봄향을 가득 담은 쑥이 봄이 될 무렵 통영의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쑥은 섬에서 난 어린 쑥을 최고로 친다.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만성위염, 위궤양, 폐결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통영에서는 '입춘 전후 나오는 쑥을 세 번 먹으면 한 해 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산란을 위해 영양을 축적해 살이 오른 봄 도다리(산란한 도다리를 '물도다리'라고 하는데 맛이 떨어진다)와 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온 해쑥의 컬래버레이션! 맑은 수프를 마시듯 부드러운 맛과 향이 입안 가득히 봄으로 다가온다. 도다리쑥국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관광객이 통영으로 몰리면서 이전에는 도다리쑥국을 내지 않던 식당들도 도다리쑥국을 끓여내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오던 식당은 아무래도 내공이 다르다. 팔도식당: 도다리쑥국 1만2000원, 통영 무전동 987-6, (055)642-6477
◇담백한 상사리국
상사리는 참돔 새끼의 별칭이다. 지방이 적고 살이 단단해 봄철 통영 바다를 대표하는 맛있는 생선 중 하나다. 일본의 도미 맑은탕(지리)과 비슷하지만, 상사리국은 일제강점기 전래된 음식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향토 음식이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상사리에 순채를 넣고 국으로 끓이면 좋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강한 맛을 찾는 경향 때문에 매운탕을 선호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순하고 맑은 생선국을 끓여 먹었다.
약한 쌀뜨물에 무 썰어 넣고 멸장(멸치액젓)으로 간 하고, 무가 익으면 상사리를 넣고 거의 익을 때쯤 마늘·파·홍고추·쑥갓을 넣고 불을 끄면 된다. 상사리국을 식당에서 찾으면 "그런 메뉴가 없다"는 대답을 하기 일쑤다. 그냥 "맑은 생선탕을 끓여달라"고 하면 상사리국 비슷하게 나온다. 송학횟집: 1만5000원, 통영 중앙시장1길 8-34, (055)644-2460
◇통영 으뜸 맛! 졸복국
기다리던 졸복이 아침장에 나왔다. 흔히 참복의 소형 개체를 졸복(쫄복)이라 하지만, 둘은 전혀 종이 다르다. 진짜 졸복을 먹으면 입이 쩍쩍 달라붙고 소변색이 노래진다. 살은 포를 떠서 회로 먹거나 데쳐서 수육으로 먹는다. 복국을 끓이고 나서 마지막엔 죽을 쑤어 먹는다. 통영은 졸복국이 유명하지만, 과연 진짜 졸복국을 하는 식당이 있을까? 100% 졸복으로 국 끓이는 식당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졸복이 많이 잡혀 졸복만으로 끓여 냈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졸복이 잡히지 않자 크기가 작은 복을 가지고 복국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졸복은 크기가 작은 복이라고 고유명사화되어간다. 졸복국이라 하지 말고 그냥 복국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호동식당: 복국 1만1000원, 통영 새터길 49, (055)645-3138 동광식당: 복국 1만3000원, 통영 통영해안로 343-1, (055)644-1112
◇구수한 뱅아리국
뱅아리는 통영, 거제, 고성 등 경남 바닷가 일부 지역에서 3월 중순이 지나고 4월 중순이 되기 전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봄철 별미다. 비린 맛이 전혀 없고 고소하며 담백한 살이 젤리처럼 부드럽게 넘어간다. 농어목 망둥어과 바닷물고기다. 죽으면 몸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해 '사백어(死白魚)'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통영에서는 미륵도 기수지역에서 많이 잡혀 해마다 철이 되면 즐기던 별미지만, 지금은 귀한 몸으로 잠시 나왔다 사라지고 만다. 뱅아리국은 구수하고 깔끔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국뿐 아니라 회 무침, 부침개 등으로 다양하게 즐긴다. 회 무침은 뱅아리에 파, 미나리, 배 등 갖은 채소를 초장에 비벼 먹는다. 부침개는 달걀 물에 뱅아리를 담가 한 숟가락씩 부친다. 명화식당: 사백어 무침·전·국 3종 코스 3만원(아직 추워서 잡히지 않는다고, 3월 10일쯤부터 나온다고 함), 거제 동부면 동부로 13, (055)633-2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