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한테 주체사상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 우리 교실에서는 자유롭게 이야기합시다."
쿠바 아바나대에 다니는 북한 유학생 A씨는 작년 여름 강의실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과 통성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A씨가 북의 4차 핵실험 다음 날인 1월 7일, 그 한국인 유학생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우리 어제 수소탄 실험했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한국 학생이 "인터넷에서 봤다"고 답하자 그는 놀란 표정으로 "소식이 빠르다. 북에서는 인민들이 인터넷을 몰라 바깥세상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민들은 '미국이 북조선을 죽이려 한다'고 TV에서 말하는 걸 100% 믿는다. 그래서 악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될 바에야 핵으로 한번 싸워보고 죽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쿠바는 중국, 러시아와 함께 북한의 3대 동맹국이다. 한국과는 국교가 없다. 북 외교관이나 양성생(유학생) 입장에선 자신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어 세계 어느 곳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아바나에는 북한 대사관으론 중남미 최대 수준인 외교관 15명과 이들의 가족, 양성생과 군인 등 50~60명이 살고 있다. 한국 교민은 20여명 정도지만, 최근 연간 7500명의 관광객이 쿠바를 찾는다.
◇북 고위층 자녀 유학생, 삼성 휴대폰 써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아바나 H호텔 로비에 가면 북한 유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넷이 제한된 쿠바에서 호텔은 유료 와이파이(1시간에 2400원)에 접속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들은 북한 담배 '려명'이나 중국 수출용 한국 담배 '에쎄' 등을 피우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시청을 하며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곤 한다. 휴대전화는 삼성 갤럭시폰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 호텔에 자주 나타나는 유학생 B씨는 한국 여성 여행객이나 유학생에게 자주 접근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현지 관계자는 "한류 드라마의 영향으로 젊은 북한 남성들은 세련된 한국 여성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3년간 여행 가이드로 일했던 박모(26)씨는 "동양인이 드문 쿠바에서 남북한 사람들은 척 보면 서로를 알아본다"며 "북한의 10대 학생이 먼저 다가와 남조선 드라마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고 했다.
아바나의 한 대형 야채시장은 남북 주부 간 만남의 장소다. 북 외교관 부인들은 대개 매주 토요일 아침 5~6명씩 같이 시장을 본다. 김장을 담그기 위해 배추 수십 포기를 한꺼번에 사가기도 했다. 교민 한모(44)씨는 "시장에서 만나 안면을 튼 남북 주부들은 직접 만든 반찬을 나눠 먹기도 한다"고 전했다. 동네 에어로빅 연습장에서 북 외교관 부인을 알게 됐다는 교민 최모(46)씨는 "'북핵은 자위용'이라는 뻔한 사상교육을 나에게까지 반복해 그 이후 보지 않는다"고 했다.
◇패기머리 안 해… "노역 안 하니 살쪄"
북한 유학생 C씨는 "북에는 규찰대가 있어 (김정은의) 패기머리를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보는 눈이 없으니) 길러도 된다"고 했다. C씨는 "(북한에서) 노는 날은 무조건 사역하러 나가서 힘들다"며 "여기에서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살이 찐다"고 했다. 쿠바에 온 지 몇 달 만에 체중이 20㎏ 늘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북에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 체념했다. "나는 행운이다. 북에서 이렇게 (해외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택받은 것이다. 하지만 나도 3~4년 후에는 돌아가서 인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이들은 통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B씨는 통일에 대해 "위대한 장군님이 선도해…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는 "나도 남조선이 잘사는 걸 안다. 반도체가 유명한 것도 알고"라며 "남조선 경제력과 우리 군사력이 만나면 강대국이 되니까 일본이나 미국이 제일 반대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북 대사관 직원 자녀들은 수업이 끝나면 대기하고 있는 대사관 차량을 타고 사라졌다. 일부 대사관 가족들은 대사관에서 공동 숙식하는 걸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부분 통제 탓에 1년 넘게 쿠바에 머물러도 아바나 밖으로 여행할 수 없다. 한 북한 학생은 "휴일에는 그냥 대사관에서 동무들과 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