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의 탄생

독립기념관의 필요성에 관한 얘기는 광복 직후부터 나왔다. 하지만 매번 예산문제와 다른 사안들에 밀려 198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 논의가 되기 시작했다. 1976년, 민족박물관의 형식으로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추진하면서 사무국까지 세웠으나 예산 부족으로 백지화됐다. 이후 문화방송이나 사회 각계각층에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와 실질적인 행동이 따랐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82년 일본 문부성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제강점기 관련 부분을 일본 측에 유리하게 수정하면서 역사 문제가 불거졌다. 문부성이 검정하면서 수정한 내용에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징용 등 일제가 우리에게 강제했던 것들이 모두 자율적으로 이뤄졌으며, 강제성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일본 측의 심각한 역사 인식 문제를 계기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독립기념관은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기억하고 기림으로써 가해국인 일본으로 하여금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당시 독립기념관 건립은 정부 주도 하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독립유공자를 비롯한 각계 대표 55명 등으로 구성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됐다. 민간 주도로 이뤄진 사업이지만 국민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염원이 담겨 '국민적 사업'으로 여겨졌다. 이 사업으로 500여억원의 국민 성금이 모아졌을 만큼 만큼 국민적인 열기와 관심이 뜨거웠다. 

당초 3월 1일 또는 8월 15일과 같은 상징적인 날에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독립기념관은 1986년 8월 15일에 개관 예정이었다. '온국민 걷기대회'가 열리는 등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개관을 10여일 앞둔 4일 밤에 저가의 전기장비와 가연성 소재 사용으로 인해 본관 '겨레의 집'에 화재가 일어났다. 다행히 훼손된 전시품들은 없었으나 본관의 지붕까지 모두 타 버려 개관이 1년 뒤로 늦춰졌다. 복원 공사와 확실한 화재 대비책을 갖춘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에서야 한국 독립운동사, 근·현대사의 새로운 성지로서 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독립기념관은 왜 천안에 있을까

독립기념관의 위치는 수도권에 집중된 주요 박물관들과 달리 충남 천안에 위치하고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충남 천안은 유관순 열사가 3·1 운동 당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아우내 장터가 있는 곳이다. 1919년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에서 처음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을사조약 전후부터 진행되어온 일제의 기만적, 야만적 행동에 대해 우리 민족이 자발적으로 크게 항거한 사건으로 의미가 크다.

2014년 2월 28일 오후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을 찾은 아이와 어머니가 ‘태극기나무’를 구경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제95주년 3·1절을 기념해 태극기나무 포토존 설치 등 여러 체험 행사를 기획했다

이 만세 운동에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伯夏)·김상철(金相喆) 등의 20대 청년들과 조인원(趙仁元)·조병호(趙炳鎬)·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 다양한 마을에서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퍼져갈 만큼 뜨거웠던 3·1운동 정신은 후대에도 깊이 전해지고 있다.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닌 3·1운동이 일어난 고장에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점에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한편, 천안에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묘가 있다. 동쪽 은석산에 있는 묘는 원래 서쪽의 흑성산 아래에 쓰려고 했다. 그러나 유명한 지관(地官)이 이곳은 훗날 나라에서 귀하게 써야 할 장소라 말해 은석산에 묘를 썼다고 한다. 지관이 얘기한 훗날 귀하게 써야 할 자리는 현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성지인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곳이다.

독립기념관 상징물

겨레의 탑(좌), 겨레의 집(우)

겨레의 탑 : 독립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탑이다. 길이가 51m가 되는 쌍탑이다. 대지를 박차고 막 날아오르려는 새의 모양이기도 하고, 기도를 위해 모은 손의 모습을 하기도 한 이 탑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영원히 뻗어나가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독립, 나아가 통일로의 염원까지 담고 있다.

겨레의 집 : 독립기념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겨레의 집'이다. '겨레의 집'은 86년 완공이 되어 개관을 10여일 앞둔 시점에 화재로 불에 타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한국적 전통 양식에 기반하여 만든 겨레의 집 지붕은 독립기념관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하지만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물 15선에도 이름을 올릴만큼 평가가 갈리는 건축물이다.

전시관 구성

가야 기마무사상

제 1전시관 (겨레의 뿌리) : 제 1전시실은 50만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개항 이전인 1860년대까지 민족이 꽃피운 문화와 고난 극복의 역사들을 방대한 역사적 전시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을사늑약 모형

제 2전시관 (겨레의 시련) : 1860년대 부터 1940년대까지 우리 민족에게 일어났던 변화와 시련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개항이 가져다 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소개하는 동시에 일제가 우리에게 행했던 갖가지 수탈과 민족말살의 증거들을 모아둔 곳이다.

안중근 혈서 엽서

제 3전시관 (나라 지키기) :  의병운동, 애국 계몽운동, 국권회복 운동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 과정과 일제와 친일파들을 처단했던 의사와 열사들의 투쟁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대한독립선언서

제 4전시관 (겨레의 함성) :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절을 주제로 하는 전시실이다. 전시실에 가장 처음 들어가면 파고다 공원에서 있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장면을 관람할 수 있다. 제 4전시실 함성의 광장 중심부에는 '3·1정신상'이 놓여 있다. 1987년 개관할 때 부터 있었던 조각상으로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3·1운동의 의지와 독립기념관의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하지만 지난해 청동 제작된 조각상을 독립기념관 측에서 작가의 동의 없이 흰색으로 도색을 해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광복군총사령부

제 5전시관 (나라 되찾기) : 항일무장투장을 주제로 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진행된 무장단체들의 투쟁 과정과,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피묻은 태극기, 이회영 선생의 중국식 의복 등 항일 투쟁의 증거들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 요인

제 6전시관 (새나라 세우기) : 민족문화 수호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주된 내용이다. 조선어학회, 광주학생운동 등 여성, 노동자, 학생, 농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다양한 독립 운동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역할과 활동도 이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체험전시관 1존

제 7전시관 (함께하는 독립운동)  : 다양한 독립운동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전시관이다. 함께 독립만세도 불러보고 당시 행해졌던 문화운동에도 참여해볼 수 있다. 총 6개의 존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독립기념관 찾아가는길

이미지 및 자료 출처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