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그동안 뛰어난 성적을 거둔 스포츠스타들의 뒤에서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부모들의 교육 열정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였다. 과거, 미국 뉴스전문채널 CNN이 소개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 10가지' 중, 한국이 세계 정상급 여자 골프 선수를 다수 배출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하면서 그 비결로 '타이거 맘·대디(자녀를 엄격히 훈육하는 부모)'를 들었다.
물론 자식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낸 부모의 사랑과 노력은 박수 받아야 마땅하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지독한 훈련을 어릴때부터 경험하는 그들에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골프 선수들, 스포츠 선수들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열 전체를 들여다보면 과한 구석이 속속 드러나는 건 사실이다.
병드는 아이들
2015년, '천재소녀 사건'이 잠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에 합격했다던 한국인 학생의 주장이 모조리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큰 파장을 가져온 것이다.
['천재소녀 논란' 18살 소녀는 왜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이 사건과 관련, '리플리증후군'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렸다. 리플리증후군이란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스스로도 이를 진실이라 믿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증상이다. 전문가들은 "자세한 상담 없이 리플리증후군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면서도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인해 정신적 피로감이 컸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또한 "교육열 높은 지역 모범생들에게 비슷한 문제가 많이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겉으로는 우등생인 학생들이 마음의 병을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문수 고려대구로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마치 가면을 쓴 듯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억압돼 있던 갈등이 특정한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팔이 마비됐다고 주장한 ㄱ군 사례 외에도 시험을 앞두고 심한 두통이나 복통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점은 아이들이 실제로 통증을 느낀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착한아이증후군은 모범생처럼 보이려고 갖은 고민을 숨기다가 결국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경우다. 심한 경우 갑자기 폭력적인 태도로 돌변하기도 한다.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뭐든 실수 없이 잘해내려는 학생이나,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아온 아이에게 주로 일어난다. 한부모가정이나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폭발'한 경우도 잦다.
번아웃신드롬도 흔히 보인다. 어릴 적부터 사교육에 노출돼온 학생들이 중고교 시절 어느 시점에 마치 기력이 소진(burn-out)한 듯 나가떨어지는 케이스다. 강남의 한 고교에 재직 중인 교사는 "조기 교육이 활발한 강남권에 이런 친구가 꽤 있다"고 귀띔했다. 이연정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아이들의 평균적 발달 단계에 맞춰 설계된 학교 교육과정을 앞서가는 과도한 교육을 강요하다 보면 아이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천근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아이가 선행학습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빨리 그만두고 정상적인 학습을 하도록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사회의 면면(面面)
매년 수험생 엄마들은 앞다퉈 '수능 대비 보약'을 찾는다. '총명탕' 등의 수험생용 보약은 이제 예사. 갖가지 좋다는 재료들로 만들어낸 약, 주사 등에 돈이 오간다.
서울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범 중탕액이 불티나게 팔린다. 이 지역 학부모들에게 5~6년 전부터 인기를 끈 물범탕은 캐나다에서 냉동해 수입한 '하프 물범(Harp Seal)' 고기와 함께 캥거루 꼬리, 철갑상어, 미꾸라지, 산삼 등 60종의 재료를 넣어 고아서 만든다. 하프 물범은 캐나다 어부들이 얼음판 위에서 주로 몽둥이로 때려잡는 동물로, 이 사냥 사진이 수시로 인터넷에 올라 "잔인하다"는 세계적 비난을 받곤 한다. 이날 대치동 건강원에선 물범탕을 끓이는 솥에 재료를 다 넣는 데만 20여분이 걸렸다. 닷새 동안 재료를 고아 만든 이 물범 중탕액은 한 달 치 60포가 50만원 정도 한다. 한의원에서 판매하는 총명탕(聰明湯·학습과 기억에 도움 된다는 한약)보다 2배 가까이 비싸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인 리탈린은 마약류와 비슷한 성분에다 중독성도 있어서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수험생들의 잠을 쫓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이른바 스마트 드러그(smart drug)로 둔갑해 유통되고 있다. 이런 약품들은 주로 '○○학습센터' '○○학습클리닉' 간판을 단 서울 강남·서초 등지의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원에서 처방한다.
전문가들은 약물 중독이나 환각(幻覺)·환청 증세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학생들 사이에 '스마트 드러그'가 퍼지면서 사회문제가 된 일이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불면증이나 신경과민증도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매년 수능을 앞둔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점집 문턱을 넘나든다. 이런 '입시 점집'은 서울 강남과 목동(양천구)에 많다. 30분~1시간 '상담'을 받는 데 보통 10만원씩 복채를 내야 한다. 그래도 예약하지 않고는 점을 보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몰려든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에서 역술원을 하는 송병창(53)씨는 "요즘 예약자 중 절반이 수험생"이라고 말했다. 어떤 점집에선 '수능 부적(符籍)'도 만들어 판다. 한 역술인은 "한 장에 30만원쯤 하는데 싼 편은 아니지만 고객 중 서울대 합격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나면서 학부모들 관심이 높다"고 했다.
자주 바뀌는 교육정책, 그에 따라 맞춤형 사교육은 속속 등장하고 입시용 사교육 뿐만 아니라 유아영어학원부터 청년들의 취업학원까지, 나라가 엄청난 사교육의 장(場)이 되었다.
교육부가 밝힌 우리나라 사교육비의 총 규모는 18조6천억원(2014년 기준), 한국교육행정학회 보고에 따르면 실제 연간 사교육비 총액은 30조를 웃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에 이어 사교육비 1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양상훈 칼럼] 어제 몇 점 받았나요, 이 나라 여기까지인가요]
비뚤어지는 어머니像
자식에 대한 비뚤어진 교육열은 가정파탄, 아동학대까지 이어지는 등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배우자의 지나친 교육열은 이혼사유'라는 판결도 있었다.
대한민국 엄마들이 흔히 '영어유치원'이라고 부르는 유아영어학원은 한달을 기다려야 테스트를 칠수 있고 입학시험은 따로 친다.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1년 전부터 다른 학원에서 과외를 하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 면접까지 보기도 한다는 영어 사교육이 이 지경까지 됐다.
학원들이 요즘 새롭게 골몰하는 것도 바로 이 '높은 문턱'을 만드는 것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소문이 날수록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는 엄마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일부 영어학원은 부모 면접까지 본다. 영국계 교사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서초동의 한 영어학원 원장은 "아이 영어 시험 외에 부모 심층 면접을 1시간 정도 보고 입학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오는 엄마들 후기를 보니 '객관식 설문만 50개가 넘더라. 부모의 재력과 학력을 따지는 것 같았다'는 글이 있었다.
학원에 들어가는 것조차 바늘구멍일수록 엄마들의 마음은 급해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아들은 보통 5~6세쯤부터 영어학원을 다녔지만 최근엔 2~3세로 입학 연령이 크게 낮아졌다. 18개월 아기부터 받아주는 '전문 영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영어학원이 속속 생기고 있다.
["상위 5%만 응시 가능"… 강남 유아영어학원에 무슨 일이]
아이의 대학 진학을 위해 '성적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게 한국의 학부모다. 몇년 전, 교사와 짜고 스펙을 조작해 아들을 한의대에 입학시켰다가 덜미를 잡힌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이모씨는 경찰 조사에서 "강남 한번 가보세요. 다른 부모도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라고 강변했다. 이씨 아들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고등학교에 다녔고, 이씨는 고교 진학설명회에서 아들을 사례로 강연을 할 정도로 '성공한' 엄마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들의 성적은 모두 어머니 이씨가 조작한 것이었다.
이씨가 섭외한 교사가 써준 시(詩)를 제출해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타게 했고, 토론 대회에는 수상 경력이 있는 다른 학생을 아들로 둔갑시켜 내보냈다. 이렇게 꾸민 스펙으로 이씨 아들은 2012년 서울 모 대학 생명과학계열에 입학했다가 그만둔 뒤 이듬해 다시 한의대에 들어갔다. 최근 한양대 대입 전형 R&D센터가 실시한 '대입 수시전형 인식 조사'에서는 학생과 학부모의 약 75%가 '학생부 스펙 조작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응답했다.
비극으로 이어진 해외 사례
자녀교육에 있어서 한국보다 유연할 것이라 생각되는 외국의 경우에도 비뚤어진 사례는 있다. '교육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과 캐나다에서 성적 지상주의의 압박에 시달린 자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일탈하며 가정 파탄으로 이어진 사연이 작년, 현지 언론을 통해 잇따라 조명됐다. 미국의 주류 사회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는 이민자 사회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원인은 똑같았다. 자녀의 사회적 성공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도를 넘어 개입하고 다그친 부모의 비뚤어진 교육열에서 시작된 비극이었다.
베트남系 여학생, 대입 속이고 부모 청부살해까지
캐나다 토론토 북쪽 마캄시(市)에 살던 베트남계 이민자 판(Pan)씨 부부는 30년 전 이민 와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며 딸 제니퍼를 키웠다. 제니퍼의 부모는 전형적인 '타이거 맘'이었다. 판씨 부부는 딸이 공부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서 1등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제니퍼는 어릴 때부터 과외 활동과 숙제에 내몰려 새벽에 잠들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 손에 이끌려 네 살부터 피아노를 쳤고, 동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피겨스케이팅도 배웠다. 성적은 항상 '올 에이(all A)'였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대학에 조기 진학했고 이후 아버지 뜻대로 명문 토론토대로 옮겼다.
그러나 제니퍼는 매일 대학이 아닌 동네 도서관으로 갔고, 성적표, 장학금, 명문대 진학 등도 부모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해 심적 부담을 느껴 꾸며낸 거짓이었다. 부모는 대학 졸업식에 오지 말라는 딸을 추궁하고 나서야 진실을 알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부모가 휴대폰, 노트북을 압수하고 데이트도 금지하는 등 제재를 가하자 제니퍼는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2010년 부모 청부 살해를 꾸몄다"고 했다. 강도로 위장한 이 사건으로 모친은 즉사했고 부친은 중상을 입었다. 제니퍼는 25년간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美 아이비리그 학생들, 잇따라 스스로 목숨 끊어
2015년, 아이비리그(미 동부 8개 명문대)를 비롯, 미국의 명문대 재학생들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자 대학들에 비상이 걸린 일이 있었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대에선 최근 13개월 동안 6명의 재학생이 자살했다. 남부 명문대인 툴레인대에서도 올해 들어 4명이 목숨을 끊었다.
뉴욕타임스는 28일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며 '잔디 깎기 부모'의 과도한 욕심이 학생들을 자살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탠퍼드대 줄리 리트콧 하임스 교수는 "자녀와 수시로 통화하며, 강의실에 등장해 수강신청을 대신 하고 교수 상담을 신청하는 학부모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며 " '헬리콥터 부모' 수준에서 진화한 이 '잔디 깎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성공에 대한 압박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학생들은 홀로서기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좌절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