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검사 외전’이 설 극장가를 독식하며 기록행진을 하고 있지만, 정작 2월에 볼만한 한국영화는 이달 중하순에 개봉한다.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감돈 영화는 뜻밖에도 20대 신예들이 총출동한 ‘순정’이다. 또 민족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그의 솔메이트인 독립운동가 송몽규(1917~1945)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흑백영화 ‘동주’는 정작 볼 때보다 다 본 뒤에 더 좋아지는 영화다. 문득 문득 비극적이라 더욱 찬란했던 두 청춘의 삶이 떠올라서다.
◇‘동주’, 일제강점기 꽃보다 찬란했던 두 청춘의 비극적 삶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 주옥같은 시를 짓고 별이 된 민족시인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의 청춘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 강하늘과 박정민이 주연하고 ‘왕의 남자’ ‘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6억원대 저예산 영화지만 놓치면 안 될 기대작으로 부상했다. 영화 자체는 흑백으로 찍어 마치 문예 영화 같다. 젊은 두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신작영화인지 헛갈릴 정도. 윤동주와 그의 사촌인 송몽규의 학창시절부터 일본 유학 당시 일제에 끌려가 의문의 생체실험에 꽃다운 목숨을 잃기까지 약 10년간의 일을 그렸다. 둘은 같은 해 한 집안에서 태어나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죽은 기이한 운명의 벗이자 라이벌이었다.
송몽규는 부끄럼을 잘 타고 조용한 성격의 윤동주와 달리 소년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면서도 활동적이어서 동료 간에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영화에서 시인을 꿈꾼 동주는 자신보다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된 몽규를 부러워한다. 문학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몽규와 의견대립도 빚는다.
그러면서도 늘 사색하고 고뇌하는 자신과 달리 신념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촌형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같은 존재다. 그런 송몽규에게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문학의 벗이자, 타고난 여린 마음을 지켜주고 싶은 동생이다. 송몽규가 “나는 총을 들 테니 넌 펜을 들라”고 말하는 이유다.
고증에 입각해 극화한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의 전기영화에 가깝다. 따라서 극적 재미는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지식인 송몽규와 고뇌하는 지식인 윤동주의 대비된 청춘은 닮은꼴의 비극적 결말로 수렴되면서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두 사람은 1943년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는 것이 당시 일제가 윤동주와 송몽규를 체포한 이유였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한 윤동주의 시는 ‘천체의 미학’ ‘부끄러움의 시학’으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시인의 꿈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암울한 시기, 너무나 시인이 되고 싶어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윤동주의 뜨거운 눈물을 포착한다.
송몽규도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조국을 해방시키려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미미한 절망적 현실이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두 사람의 삶을 보여주다보니 둘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윤동주를 통해 잊혀진 송몽규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외모마저 유사한 윤동주 역할의 강하늘뿐만 아니라 송몽규를 멋지게 연기한 박정민의 호연이 빛을 발한다.
한편 극중 둘의 초등학교 동창인 고 문익환(1918~1994) 목사를 연기한 최정헌은 실제로 강하늘의 대학시절 솔메이트다.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것을 강하늘이 뒤늦게 알고 크게 기뻐했단다. 윤동주가 좋아한 시인 정지용(1902~1950)은 문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연기했다. 12세 관람가, 17일 개봉
◇‘순정’, 섬마을 소년소녀들의 어느 찬란했던 여름날
영화 포스터에 도경수와 김소현이 뭔가 아련하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거기에 첫사랑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영화 제목 ‘순정’이 새겨져있다. 늘 찬양의 대상인 ‘첫사랑’을 요즘 신인들을 데리고 찍은 영화라고 생각됐는데 단지 서툴고 설레고 애틋한 첫사랑을 추억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섬마을 소년소녀들의 어느 찬란했던 여름날의 아름답고도 아픈 기억에 관한 영화다.
‘홍합’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창훈의 자전적 단편소설 ‘저 먼 과거 속의 소녀’가 원작이다. 실화라는 점은 이 영화에 대한 호감도를 끌어 올리는데 일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후반부 급작스럽다고 느껴질 극 전개를 ‘신파’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20대의 젊은층보다 추억거리가 많은 3040대 이상 관객층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친구들처럼 이곳 섬마을 다섯 친구들도 우정이 돈독하다. 그중 어릴 적부터 다리를 저는 수옥(김소현)에 대한 범실(도경수), 산돌(연준석), 개덕(이다윗), 그리고 말괄량이 길자(주다영)의 보살핌은 남다르다. 뭍으로 학교를 다니는 네 친구와 달리 불편한 다리 때문에 집에서 라디오를 친구삼아 하루하루를 보내는 수옥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온 네 친구와 하릴없이 음악을 듣고, 수영을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이 영화의 절반은 다섯 친구가 캔사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 아하의 ‘테이크 온 미’,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 ‘김민우의 ’사랑일 뿐이야’ 등 90년대 히트 가요와 팝을 배경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친구를 위한 순수한 우정, 우정의 우산 속에 조금씩 드러나는 첫사랑의 설렘, 그리고 미숙한 10대들의 사소한 오해가 밝고 유쾌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사랑스럽게 전개된다.
경쟁보다 배려와 화합이 우선시되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미소가 절로 난다. 그러다가 줄줄 흐르는 눈물은 단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때 그 시절 그 소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리게 저려올 것 같은 한 소년과 그 친구들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돼서다.
다섯 배우가 실제로 3개월간 전남 고흥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찍었다는데, 그 빛나는 호흡이 영화에 잘 녹아있다. 12세 관람가,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