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

영화는 때때로 현실을 훨씬 앞서간다. 2004년 개봉된 영화 '13구역'의 배경은 파리 인근의 생드니다. 몇 년 전 주인공들의 액션이 화려한 그 영화를 보며 의문을 가졌다. '아프리카 무슬림 이민자들이 몰려 산다는데 저렇게 폐허 같은 곳이 정말 파리 근방일까?' 작년 11월 파리 테러에서 그 답을 찾았다. 주범 아바우드 일행이 경찰과 7시간 동안 싸우다 사살된 곳이 바로 생드니의 어느 아파트다. 그 아파트는 물과 전기가 오래전에 끊겨 있었다고 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3구역 개봉 1년 뒤인 2005년 방리외(Banlieue·이주민들이 밀집해 사는 도심 주변) 소요 사태가 터졌다. 경찰에 쫓기던 청소년 2명이 송전소 담을 넘다가 감전사하자 이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4~20세의 이민 2~3세대들이 앞장선 과격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3주 동안 3000여명이 방화와 폭력 혐의로 체포됐다.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프랑스는 그 후 600여개 방리외 구역의 재개발에 480억유로(약 63조원)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도심의 겉모습은 바뀌었으되 이주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리외의 평균 청년 실업률이 45%에 이를 정도다. 프랑스는 2차 대전 이후 부족한 노동력을 옛 식민지인 아프리카 이민자들로 보충했다. 이들은 경기가 가라앉고 산업이 첨단화되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영화 13구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리외 소요 사태에 이어 10년 뒤 파리 테러가 터진 근본 이유는 이들의 소외감이 갈수록 곪았기 때문이다.

재작년엔 13구역을 리메이크한 '브릭맨션:통제 불능 범죄 구역'이 개봉됐다. 13구역의 미국판 영화다. 브릭맨션 입구에는 경찰과 군인이 배치돼 출입을 통제한다. 유색인종들이 사실상 격리돼 사는 생드니 같은 곳이다. 이 브랙맨션의 배경은 한때 미 북부 최대의 공업 도시였던 디트로이트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면서 2013년 파산했다. 교외에는 백인 중산층이 살고 도심엔 주로 흑인들이 산다. 흑인들은 교외에 가서 일을 하고 싶어도 대중교통이 안 좋아 출퇴근하기가 어렵다.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흑백 간 분리 거주가 제일 심하고, 범죄율도 손꼽힐 만큼 높다.

우리나라에선 13구역이나 브랙맨션 같은 영화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역을 특정할 경우 해당 주민들의 반발을 영화 제작자들이 우려했을 수도 있으나 외국인 주민 지역의 게토화가 아직 프랑스나 미국만큼 심각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엽기 살인범 오원춘이 조선족 이미지를 흐려놓았지만 외국인 주민의 범죄율은 내국인보다 낮다.

외국인 주민은 2008년 89만명에서 2015년 174만명(3.4%)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불법 체류자까지 합치면 200만명을 넘어선다. 주민등록상 외국인 주민 비율이 10%가 넘는 읍·면·동이 210곳이나 된다. 외국인 주민 비율이 50%가 넘는 읍·면·동은 10곳이고, 2~3곳은 100%에 육박한다.

문제는 외국인 주민이 늘어나는 속도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반발심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에선 '다문화 정책 반대 카페' 등 반(反)이주민 성향의 단체 10여개가 활동 중이다.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 의원이 2014년 말 이주민 지원을 위한 법안을 발의했을 때 1만개가 넘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주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5~64세의 생산 가능 인구가 올해 3700만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출산율이 세계 꼴찌 수준인 까닭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우리가 생산 가능 인구를 유지하려면 2030년까지 920만명의 이주민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정부도 작년 12월 발표한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에서 해외 우수 인력 확보를 대책 중 하나로 꼽았다. 따지고 보면 이주민들의 공(功)이 없었다면 미국이나 프랑스의 오늘은 불가능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선진국들의 이민자 비율은 12~14%이고, 호주와 캐나다는 각각 28%, 21%나 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 주민에 대해 실태 조사도 하고 한국어 교육, 법률 상담도 해준다. 외국인 밀집 지역을 다문화 특성화 도시로 육성한다는 번듯한 계획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시성 행정보다는 우리가 외국인 주민과 더불어 살지 않고는 미래가 밝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게 시급하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영화 13구역의 비극이 우리나라를 엄습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