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명 방송 음악감독

KBS에서 오랫동안 국내외 문화와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음악을 제작해온 사람으로서 아쉬운 것이 있다. 그동안 맡아온 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걸어서 세계속으로'와 '영상앨범 산'은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삶을 전달해주고 있다. 여기에 쓰이는 음악도 자연히 그 나라 노래들로 채우게 된다. 음악 문화가 발달한 나라를 만나면 선곡의 폭이 넓어 즐겁고, 알려진 음악가를 찾기 힘든 생소한 나라를 만나면 고생스럽게 일하게 된다. 아무튼 각종 정보를 뒤져 그 나라 음악을 입수해 시청자들 귀에 쏙 들어올 좋은 곡을 추리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마저 불가능한 때가 있으니 바로 일본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이다. 일본어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쓰지 못하는 것이 우리 방송계의 암묵적 현실이다. 2013년부터 작년까지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맡으며 일본 편을 세 차례 제작했지만 단 한 곡도 일본어 노래를 쓰지 못했다. 세계적 수준의 가수가 많은데도 그 노래들을 담아내지 못해 답답했다. 예를 들면 보사노바 여가수 올리비아, 아오키 카렌, 최고 남자가수 히라이 켄, 재즈 가수 고바야시 케이 등이다. 담당 PD들을 설득해 써보자고 했지만 누구도 선뜻 모험하려 하지 않았다. 답변은 늘 그냥 가사 없는 연주곡만 쓰라는 것이었다. 꼭 노래가 필요한 장면에서는 일본 가수가 영어로 부른 노래를 사용하곤 했다.

일본 노래에 관해 방송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프로에서 일본 군가가 나가서 시청자들 항의가 빗발쳤다' '어느 프로에서 기미가요를 써서 큰일 났었다'는 등의 얘기가 돈다. 일본 노래 하면 떠올리는 곡이 군가나 국가(기미가요) 정도라는 사실이 우리가 그들의 대중음악을 얼마나 기피 혹은 외면해왔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문의하니 2004년 제정된 '일본 문화 개방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일본 대중가요는 '부분적 개방' 대상으로 분류돼 일본 가수가 우리 방송에 출연한 경우 일본어로 노래 부를 수 있으며, 공중파에서 일본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써도 여론 악화를 부를 곡이 아니라면 문제없다고 한다. 또 이미 케이블 방송에서는 일본 대중가요도 전면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지상파에서도 일본 가요에 대한 실질적 개방이 이뤄져 모든 나라의 노래를 자유롭게 감상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