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74) 고려대 명예교수의 서울 옥수동 집 5평 남짓한 서재 가운데엔 책상이 있고, 책상 한가운데엔 2010년형 2.5㎏짜리 노트북이 한 대 있다. 노트북 전원이 들어오자 김 교수는 인터넷 창을 열었다. '바로가기' 아이콘을 누르자 뜬 것은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프랑스어사전이었다. "이것 봐. 번역할 때 얼마나 좋아. 누가 요즘 (종이) 사전을 찾아?"
김 교수는 지난 42년 동안 100권이 넘는 프랑스 문학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불문학자다. 지금도 동시에 맡고 있는 번역 일만 너덧 개에 이른다. 알베르 카뮈에 관한 연구로는 국내에서 첫손 꼽힌다. 프랑스 카뮈 학회 창립회원이고 2009년엔 카뮈 전집(전 20권)을 국내 최초로 완역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40여년 번역 활동을 정리하며 작년 11월 낸 책 '김화영의 번역수첩'에 이렇게 썼다. "나는 늘 글의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 (중략) 그런데 번역은 (중략) 누군가 이미 시작해놓은 것을 뒤에서 따라가면 된다. 그야말로 나의 가장 고통스러운 어떤 것을 대신 해준 사람의 노고에 편승하는 일이다."
100여권의 번역서가 단지 도피처였다는 말일까. 등단 시인인 그는 그러면서도 "글쓰기의 경험이 번역에 큰 도움을 준다"고 썼다. 알 듯 말 듯 했다. 지난 18일 그를 찾아가 만났다. 반나절 동안 '특강'을 들었다.
'선진국 콤플렉스'로 시작한 번역
첫 번역은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던 1974년, 서울에 마땅한 거처가 없어 친척집에 묵었는데 돈이 부족했다. 친구의 소개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잃어버린 얼굴'을 매절(買切·목돈에 번역 저작권을 넘겨주는 것) 방식으로 번역했다. 그는 "'열 장 번역에 얼마' 식이니까 노예가 된 기분이었고, 빨리 끝내야겠다는 마음에 성의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고려대 불문과 조교수가 됐다.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 원하는 작가를 선택해 번역할 수 있었다. 방식도 매절이 아니라 책 수익의 일부를 받는 인세 방식으로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나라 전반에 이른바 '선진국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나도 우리 독자들에게 되도록이면 문화 선진국의 좋은 작품을 읽혔으면 했어요."
좋은 작품이란 건 뭘까. 김 교수는 "그건 '인생이 뭐냐'는 것과 비슷한 물음"이라고 했다. 대체로 구조가 짜임새 있고 문장이 좋은 데다 내용이 인간의 마음에 깊이 천착했으면 "번역할 만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32년간의 대학 재직 기간 동안 기념비적인 불문학 서적을 많이 번역했다. '이방인'(알베르 카뮈·1987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파트릭 모디아노·1978년), '섬'(장 그르니에·1980년) 등이다.
번역서가 많은 개인적 이유도 있다. 자신의 글을 시작하는 게 힘들었다. 그는 "원고지 5장짜리든, 100장짜리든 우선 머릿속에 글의 실마리가 떠올라야 하는데 잡생각만 맴돌았다"며 "그래서 산책하고 커피와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별짓 다 해봤지만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20여권의 산문집 보다 번역서가 훨씬 더 많아졌다.
그가 볼 때 실용서적은 정확하게만 번역하면 된다. 하지만 문학을 번역할 땐 그걸론 부족하다. 개별 단어·문장뿐만 아니라 전체 구조나 분위기가 잘 옮겨져야 한다. 그는 "'이방인'에서처럼 일인칭 화자가 유식하지 못한 사람이면 번역된 어투에서 그런 티가 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언어에 대한 '무게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즉 어떤 단어가 세고 약한지, 천박하고 고상한지에 대한 직관이 있어야 한다. 보통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이 좀 더 유리하다.
"카뮈 관계자 중 카뮈만 못 만났다"
김 교수가 태어난 해인 1942년 카뮈는 '이방인'을 썼다. 박사 연구 주제로 카뮈를 택했던 1969년부터 지금까지 카뮈는 그의 최대 화두(話頭)다. 그는 카뮈의 부인 프랑신(1914~1979)을 비롯해 카뮈의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들과 교유를 나눴다. "카뮈 관계자 중 카뮈만 못 만났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처음부터 카뮈를 전공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시인인 말라르메를 공부하려고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마침 한 소르본대 교수가 방대한 말라르메 연구서를 냈다. '과연 저분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어 포기했다. 그는 "불어 대사전에 카뮈의 문장이 예문으로 가장 많이 인용돼 있었다"며 "사전에 인용이 됐다면 모범적 불어라고 생각하고 전공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반세기 전의 작가 카뮈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엔 아직도 극단으로 치닫는 전사(戰士)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2차대전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지식인의 자기 반성을 강조했던 카뮈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의 요즘 취미는 동네 헬스장에서 물구나무서기 운동을 하면서 불시(佛詩)를 암송하는 것이다. 혈액순환에 좋다고 한다. 그가 자주 외우는 시는 폴 발레리의 24연짜리 '해변의 묘지'다. 6분이면 완송한다고 한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