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무엇보다 먼저 천·지·일월성신과 자연의 여러 신령을 숭배했고, 이러한 원시 신앙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믿음 속에 많이 남아 있다."(서문 중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종교 지형도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번역·출간됐다.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살림)이다. 이 책은 1924년 파리외방전교회가 홍콩에서 출간했고, 명지대-LG연암문고가 입수해 번역·출간했다. 천주교 박해 시기 조선 선교를 맡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순교의 역사는 1874년 달레 신부가 펴낸 '조선천주교회사'에 서술된 바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선천주교회사' 이후~1923년 사이의 상황 서술이 눈에 띈다.
◇개신교와의 경쟁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확보되면서 조선의 종교계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오랜 카타콤바(지하교회) 시대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온 천주교 세는 급증했다. 1911년엔 7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약진한 것은 후발 개신교였다. 1923년 당시 천주교인은 9만6151명, 개신교인은 29만5698명이라고 이 책은 적고 있다. 책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개신교는 어떻게 저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라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을 모르는 척하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큰 잘못일 것"이라고 적었다.
이 책은 개신교 약진의 비결로 ▲막대한 물량(천주교는 연 3만엔, 개신교는 200만엔)과 ▲지도층 상대 선교 ▲실용성 ▲혁신성을 꼽고 있다. 책은 "개신교 목사들은 '앵글로색슨 민족답게' 실용적 시각으로 교육기관과 YMCA를 통한 스포츠 교육에도 나선다"며 "개신교는 그 고유의 정신과 교육제도로 인해 필연적으로 혁신적"이라고 말한다. "개신교는 학생들의 국민성을 변화시키기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와 반대로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천주교는 그것이 뿌리내리는 곳에서 그곳 사람들의 관습에 아주 쉽게 적응한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일본인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개신교를 믿어라. 미국이 그대 뒤를 지켜줄 것이다"라며 '미국의 힘'을 활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렇지만 천주교 역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책은 "개신교 신자 숫자는 29만5698명으로 나와 있지만 개중에 세례를 받은 이는 10만3957명에 불과하다"며 "열정적인 천주교인들에게 당부하노니, 그리스도의 선교사들을 열심히 돕고, 그대들의 기도와 애긍(哀矜), 희생을 통해 새로운 승리의 시간을 앞당기도록 할지어다"라고 말한다.
◇불교·천도교·대종교
이 책은 조선총독부 통계를 인용해 1923년 당시 불교 남녀 승려의 수는 7600명, 본사(本寺)는 40개, 말사(末寺)는 1306개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일본인들은 신도(神道)를 들여와 전파하려 애쓰고 있으며 벌써 6000명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그 추종자가 됐다"고 적었다. 천도교에 대해서는 "유·불·선의 혼합에 그리스도교를 다소 가미했다. 교인 수는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했으며 시천교(侍天敎), 대종교, 단군교, 청림교, 태일교 등이 생겨났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