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등 달러 페그제 국가, 핫머니 공격에 대응 부심
1990년대에도 유럽·아시아 페그제 국가 핫머니 먹잇감
페그제 포기 따른 외환위기 확산 재연 우려 부각
전세계 달러 페그제(고정환율제)국가들이 핫머니(국제 단기성 투기자금)의 공격을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중국 홍콩 등 페그제 운용국이나 도시의 통화 당국들은 페그제 포기에 따른 환율 혼란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를 잇따라 내놓거나 적극적인 환율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1990년대 유럽과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페그제 국가에 대한 환투기 공격이 기승을 부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과 1990년대 상황이 유사하지만, 당시와 같은 외환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 사우디에서 홍콩까지 페그제 방어 안간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미 달러화에 대한 리얄화 페그제 포기에 베팅하는 투자를 뿌리 뽑기 위해 18일 국내 은행과 외국은행 지점에 리얄화 선물옵션 거래를 금지시켰다고 블룸버그통신이 20일 보도했다. 리얄화 선물 옵션 가격은 최근 2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리얄화 선물 옵션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리얄화 약세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19일 해외 송금을 포함한 국경간 자금 거래에 대해 20%의 거래세를 부과하는 자본 통제에 들어갔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달 21일 마나트화 절하 압력에 달러 페그제를 포기한 후 마나트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물가가 급등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자 자본통제라는 강력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지난해 8월 달러 페그제를 포기한 카자흐스탄은 최근 통화 가치가 30% 이상 급락하자, 대통령이 카이렛 켈림베토브 중앙은행 총재를 전격 경질했다.
홍콩 당국은 핫머니의 홍콩 달러 공격에 대응해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일 홍콩 외환시장에서 홍콩 달러의 12개월 선물 가격은 1999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홍콩 당국의 홍콩 달러 가치 방어를 위한 홍콩 달러 매입이 늘면서 은행간 홍콩 달러 대출 금리가 최근 7년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노먼 챈 홍콩금융관리국(HKMA) 총재는 앞서 지난 18일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 통화 절하에 베팅하는 국제 환투기 세력 ‘기승’
최근 달러페그제 운용국가들이 통화 가치 절하 압력을 크게 받으면서 국제 환투기 세력들이 고정환율제를 도입한 국가들을 노리고 공격에 나섰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공격을 받는 곳은 대부분 신흥국으로 미국이 금리 인상 주기에 들어가면서 달러 대비 신흥국 통화 약세 경향이 강해진데다 신흥국의 경기둔화가 상대적으로 뚜렷한 게 핫머니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환투기 세력들은 통화 가치가 고평가된 국가를 골라 공격한다. 지난 1992년 유럽 외환위기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국제 환투기 세력이 출몰했다.
국제 환투기 세력에게 고정환율제를 도입한 국가는 제일 좋은 먹잇감이다. 정부가 고정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 포기하는 비용보다 크다면 정부가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것이고, 이는 통화 가치의 급격한 절하로 이어진다. 1992~1993년 유럽의 외환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 당시 유럽은 역내 통화의 환율 변동폭을 제한하는 고정환율제인 유럽통화시스템(EMS)을 채택한 상태였다. 첫 타깃은 핀란드와 스웨덴 등 북구권 통화였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EMS 회원국이 아니지만, 회원국이 되기를 원했던 터라 고정환율제를 차용하고 있었다.
북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후반 국제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부동산 및 증시가 급등한 상태였다. 하지만 1990년 들어 유럽 각국이 긴축정책을 도입하며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고, 북유럽 국가의 통화 가치가 지나치게 고평가됐다는 진단이 이어졌다. 1992년 9월 북구권 통화 약세에 베팅하는 환투기 세력이 몰려든 배경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EMS 회원국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환율을 방어했는데, 이는 투기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핀란드는 외환보유고만 소진한 채 1992년 9월 8일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마르카화를 15% 평가 절하했다.
이 후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 등 헤지펀드들은 영국, 이탈리아(1992년) 독일(1993년)등 서유럽을 공격, 수 조원의 수익을 거둔 후 신흥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신흥국은 1980년대 후반 외국인 직접투자(FDI) 와 수출 급증 덕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터였다.
태국과 말레이시아(1997년)에 이어 홍콩(1998년)이 공격을 받았고 홍콩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도 통화절하에 따른 외환위기로 몸살을 앓았다. 헤지펀드들은 현지은행에서 차입한 현지통화로 달러화를 매입하고, 현지통화를 공매도하는 식으로 가치를 떨어뜨렸다.
현지 당국이 통화가치 방어를 위해 자국 통화를 매입했고, 이 때문에 시중에 통화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은행간 차입 금리가 단기적으로 인상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헤지펀드들은 역내 금리 인상으로 증시가 하락하면, 주식을 공매도하는 방식으로 차익을 거뒀다.
최근 홍콩과 중국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홍콩 시장에서 홍콩달러와 위안화의 급격한 하락세가 나타나고 이어 홍콩과 중국 당국의 개입으로 홍콩 달러와 위안화 대출 금리가 급등하면서 홍콩과 중국 증시가 하락하고 있다.
1998년 홍콩은 외환시장에서 1180억 홍콩달러(약 19조2000억원)를 들여 달러를 사들이고, 주식을 대거 매입하는 식으로 핫머니와 전쟁을 벌였다. 1997년 8월 1만6000선을 웃돌다가 1998년 8월 6600까지 밀렸던 홍콩 항성지수는 18% 급등했다. 헤지펀드는 공매도를 위해 빌린 값보다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서 갚아야 했다. 유럽에서 거액을 챙긴 헤지펀드들은 홍콩에서는 패했지만 아시아 외환위기를 확산 시키는 피해를 입혔다.
◆”1998년 외환위기 재연 안될 듯”
시장 전문가들은 달러 페그제 포기에 따른 위기 확산이 재연될 것이란 전망에 대해선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SCMP가 전했다. 블룸버그통신도 “홍콩 내 은행들이 중국 본토와 홍콩 기업에 빌려준 대출 채권의 불확실성이 커진 것은 맞지만, 1998년과 달리 주택 대출은 안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주택 대출이 이미 담보인정비율(LTV)등의 규제를 받고 있어 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앤드류 펑 항성뱅크 이사는 SCMP에 “증시 폭락과 경기둔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자본 유출로 이어져 홍콩 달러 약세를 야기함으로써 홍콩 달러 약세에 베팅하는 투기 세력이 생길 수 있지만 페그제를 흔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펑 이사는 “홍콩 당국이 페그제 유지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3370억홍콩 달러에 달한다”고 전했다.
루이스 체 홍콩 VC브로커리지 대표는 그러나 “홍콩 당국이 페그제를 유지하기 위해 1997~1998년에 했던 것처럼 대출 금리를 급격히 올릴 경우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며 “대규모 자금을 빌린 기업 주가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