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의 '정봉'(안재홍)은 미래를 예견한 패셔니스타인지도 모른다. 그가 좋아하는 분홍색이 올해의 유행 색상으로 떠오른 데 이어, 평소 즐겨 입는 일명 '추리닝'(트레이닝복)이라는 운동복은 다가올 봄·여름, 패션의 필수품이 됐다. 7수생이자 백수인 정봉이를 떠올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백수룩' 혹은 '고시생룩' 정도가 될 것이다.
◇우아하게 '추리닝' 한 벌 입어볼까?
지난 11일 영국 런던 켄싱턴 가든에서 열린 버버리 남성 컬렉션 쇼에서 모델들은 트렌치코트 안에 지퍼를 끝까지 올린 트랙 재킷(트랙슈트의 윗옷)을 입고 나왔다. 색상은 파랑·빨강의 원색이 눈에 띄었다. 베트멍은 90년대 학생들 사이 유행했던 캐주얼 브랜드 '챔피언'의 초록색 운동복을 패러디한 스웨트셔츠와 바지를 내놨다. 운동복을 활용한 패션은 여성 컬렉션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끌로에와 타미 힐피거, 로에베는 여성복 컬렉션에서 위·아래 같은 색상의 트랙슈트를 선보였다. 흔히 '추리닝'이라고 불리는 트랙슈트는 육상 선수의 보온복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상·하복이다. 고시생이나 백수가 집과 만화방, 수퍼마켓을 오갈 때 보여주는 후줄근함과 편안함이 포인트다.
◇낡은 듯 촌스러워야 멋스럽다
'백수룩'은 다양하게 변주돼 이미 패션으로 자리 잡았다. 트랙슈트 말고도 지난 1년간 컬렉션에는 스웨트셔츠, 후드 티 같은 간편복이 두드러졌다. 비주류였던 힙합 문화가 주류로 진입하고 스트리트 패션이 런웨이에서 각광받으면서 운동복도 백수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일상복과 운동복을 겸하거나 평범한 티셔츠에 운동화를 받쳐 입는 패션이 최근 인기를 끈 것도 '백수룩'이 탄생하게 된 배경 중 하나다. 추리닝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옷이기도 하다. 10여년 전 타월 소재의 몸에 딱 붙는 분홍색 트랙슈트를 입고 다녔던 패리스 힐튼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운동복 차림의 연예인들이 파파라치 사진에 많이 찍히면서 대중의 인식이 바뀌기도 했다. 가난한 백수의 상징이었던 추리닝이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의 상징으로 바뀐 셈이다.
◇추리닝에 치마 받쳐 입으면 '쿨~'
그렇다고 운동복을 대충 걸쳤다가는 백수 취급을 못 면할 수 있다. 끌로에와 알렉산더 왕의 패션쇼는 쏠쏠한 팁을 제공한다. 끌로에는 복고풍의 트랙 재킷에 하늘하늘한 치마를, 헐렁한 트랙 팬츠에 실크 민소매 상의를 배합해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트랙슈트를 입지 않고 백수룩을 완성하고 싶다면 알렉산더 왕의 쇼에서 나온 것처럼 상체를 완전히 감쌀 정도로 커다란 후드티에 긴 치마를 입으면 된다.
새로 구입한다면 영화 '사망유희'의 이소룡이나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를 떠올려보자. 이소룡은 노란색 바탕에 검정 줄무늬가 있는 것을, 정봉이는 자주색이나 파란색 등 원색에 가까운 것을 주로 입었다. 타미 힐피거의 자주색과 노란색을 섞은 트랙슈트처럼 1980~90년대 분위기를 살린 것들이 봄·여름 상품으로 많이 나왔다. 적당히 낡은 듯, 촌스러워서 편안해 보이는 것이야말로 '백수룩'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