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가 조금 넘는 키, 짙은 화장이 아직 어색한 앳된 소녀가 빙판 위를 날아다녔다. 일곱 번의 점프 동작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음악과 동시에 멈춰 섰다. 소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70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가 열린 10일 오후 목동실내빙상장. 여자 싱글 시니어 부문에 출전한 유영(문원초5)의 연기가 끝나자 경기장엔 환호가 울렸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에 이어 이날 프리스케이팅에서도 개인 최고 기록(122.66점)을 세운 유영은 총점 183.75점으로 우승했다. 유영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1등은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언니들이 할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7분의 짧은 문답 중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클린한 것(실수 없이 깨끗하게 연기한 것)만으로 너무 좋아요"였다. 최다빈(수리고)이 총점 177.29점으로 2위, 임은수(응봉초)가 175.97점으로 3위였다. 프리스케이팅 여자 출전자 24명 중 5위 안에 초등학생이 3명이나 돼 '연아키즈 시대'를 실감케 했다.
만 11세8개월인 유영은 이날 '피겨 여왕' 김연아가 2003년 같은 대회에서 세웠던 역대 최연소 우승(만 12세7개월)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날 시상에 나선 김연아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 초등학교 다닐 때보다 (유영이) 더 잘한다. 기본기를 더 충실히 다지고 부상에 유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영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우승하는 장면을 TV로 보고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두 살 때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로 건너간 유영은 이후 싱가포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유영이 처음 빙판을 탄 건 우리 나이로 일곱 살 무렵. 연습은 일주일에 2번, 30분씩이었다. 말 그대로 취미였다.
유영은 하루에도 수십 번 김연아의 경기 동영상을 되풀이해 보며 점프 연습을 했다. 이에 어머니 이숙희(46)씨는 "좀 더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에 딸을 데리고 2013년 3월 한국에 들어왔다. 모녀는 빙상장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 23㎡(약 7평)짜리 원룸을 얻고 생활했다. 지금 유영을 지도하는 한성미(36) 코치와도 그때 처음 만났다.
외국에서 살다 온 유영에게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말이 서툴러 학교생활에 뒤처졌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하루 7~8시간 강훈련은 체력적으로도 부담이었다. 피겨 실력이 늘고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학교에서도 활발했던 모습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어머니 이씨는 "어린 나이지만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인 유영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하지만 몸 관리 때문에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였다.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먹는 돼지껍질과 삼겹살도 들어가 있다. 떡볶이·치킨·피자·젤리도 빼놓을 수 없다. 유영은 "훈련 때문에 바깥에서 밥을 사 먹는 경우가 많은데, 할머니 댁에 가서 집 밥을 먹을 때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유영은 소녀답게 만화 '톰과 제리'나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도 좋아한다. 최근엔 빠듯한 훈련으로 자주 보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수다를 떨고 훈련하는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도 즐긴다.
전문가들은 큰 기대를 나타냈다. 안소영 대한빙상경기연맹 경기이사는 "점프·스핀 등 기술적인 면도 좋지만 음악을 완전히 소화해 연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며 "이런 끼는 타고나는 측면이 강하다"고 했다.
유영은 2015년 1월 피겨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국내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였다. 하지만 곧 국가대표 자격을 반납해야 할 상황이다. 지난해 7월 대한빙상경기연맹 이사회가 피겨 국가대표 자격을 '만 13세 이상'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연맹은 "만 13세가 되지 않으면 ISU(국제빙상경기연맹)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는 만큼, 다른 선수에게 기회를 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연맹 관계자는 "연맹 차원에서 유영에게 별도의 지원을 해주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유영은 만 15세가 돼야 하는 연령 제한 규정 때문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나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