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미르 야거(체코)가 개인 통산 732번째 골로 연결된 퍽을 들고 있다. 자신의 이름과 숫자 ‘732’를 새겼다.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플로리다 팬서스 공격수 야로미르 야거(43·체코)의 계약서에는 특이한 문구 하나가 있다. '훈련장을 24시간 언제나 사용한다'는 조항이다. 야거 한 명을 위해 한밤 링크의 불을 켜고 정빙기로 빙질을 다듬고 관리인이 대기한다.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아들뻘 선수들과 경쟁하기 위해 처절할 만큼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다. 팀 트레이너는 그를 "20년 이상 어린 후배들보다 운동 능력이 좋다"고 평가하며, 팬들은 그를 '진짜 아이언맨(Real Iron Man)'으로 부른다.

NHL '현역 최고령' 선수인 야거가 지난 21일 밴쿠버 캐넉스전(4―4, 슛아웃 5대4 승)에서 1골을 추가하며 개인 통산 732골을 기록, NHL 역대 최다득점 단독 4위가 됐다. 12년간 이 부문 4위였던 마셀 디온(은퇴·731골)을 제쳤다. 역대 1위 웨인 그레츠키(은퇴·894골) 등 야거보다 통산 득점 순위가 높은 3명은 모두 캐나다 출신이다.

18세인 1990년 체코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탄 야거는 그해 NHL에 데뷔해 득점왕 5회,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 1회를 수상했고 스탠리컵(챔피언전 우승 트로피)도 2차례 들어 올렸다. 2001년 FA(자유계약선수) 계약 당시엔 NHL 역대 최고 몸값(8년간 8800만달러)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1월엔 NHL 최고령 해트트릭 신기록(만 42세 322일)을 세웠으며, 올해 세계선수권에선 MVP를 수상했다.

야거는 유럽 출신 중 NHL에서 가장 큰 부와 명성을 이미 거머쥔 선수다. 그런데도 40대 중반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질문에 야거는 "왜 그만둬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가 하키에 빠진 건 불우한 가정사와 관련이 있다. 부유한 지주였던 야거의 할아버지는 체코 공산화(1948년·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이후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다 정치범으로 감옥에 끌려가 1968년 세상을 떠났다. '프라하의 봄'이 있던 해이자, 야거가 태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야거의 희망은 아이스하키뿐이었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와 '동네 하키'의 매력에 흠뻑 빠진 야거는 "국가가 나에게 준 건 냉혹한 시간(ice time)과 아이스하키 장비뿐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반공주의자가 된 야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등번호 '68'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10대 때 하루에 스쿼트 1000개, 슛 연습 500개를 소화하며 꿈을 향해 달렸고, 체코 국적 선수로는 처음 NHL에 진출했다.

야거는 "부상만 없다면 50세까지도 뛸 것"이라고 말한다. 올 시즌 야거를 영입한 팬서스는 동부 콘퍼런스 7위를 달리며 4시즌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상위 8개 팀)을 노리고 있다. 야거의 전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