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 좀 많이 마셨네요. 소주 도수가 낮다고 마음 놓고 마시다가 취하는 날이 많았죠."

서울 목동 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지연(28)씨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들려준 말이다. 실제로 주류업계는 2015년 한 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신 술이 작년보다 조금 더 많았을 거라고 관측한다. 하이트진로 노은정 대리는 "맥주는 작년과 거의 비슷하게 팔렸지만 소주는 작년보다 2%가량 더 많이 팔렸고, 과즙을 넣은 리큐르도 무척 많이 팔렸다"고 했다. 10일 통계청에 따르면 '가구당 한 달 평균 소비액' 중 술과 담배에 쓰이는 액수는 2014년 2만7893원이었지만, 2015년 9월까지는 3만2617원이었다. 주류 전문가들은 올해 순한 술이 큰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오히려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순한 술의 경쟁이 심했던 2015년이었다. 연예인 모델이 소주나 과실합성주를 아예 온더록(술에 얼음을 타서 먹는 것) 잔에 마시는 모습을 보여줬을 정도다(왼쪽). 일부에선 폭탄주에 ‘구름처럼’ ‘하이슬’ 같은 이름을 붙이며 술도 ‘놀이’처럼 마셨고(가운데), 늘어나는 여성 애주가들을 겨냥해 음식과 술의 궁합이 강조됐던 해이기도 했다(오른쪽).

순하다고 더 마셨다

올해는 주류업계는 '순한 술'로 '독한 전쟁'을 치렀다. 시작은 작년 말. 올해 시장을 겨냥해 하이트진로가 소주 '참이슬'의 알코올 도수를 18.5도에서 17.8도로 내리자, 롯데주류도 '처음처럼'의 도수를 18도에서 17.5도로 낮췄다. 올해 9월 하이트진로는 참이슬 도수를 아예 한 번 더 내린다. 부산 지역을 겨냥해 '참이슬 16.9도'를 내놓은 것. 1990년대 말만 해도 20도 정도였던 소주가 서로 도수 낮추기 경쟁을 하면서 3도 이상 낮아진 것이다. 주류 전문가인 홍준의 골든블루 홍보실장은 "2006년에 마산 지역에서 무학이 '좋은 데이'를 16.9도에 내놓으면서 저도 소주 열풍이 시작됐고, 그 이후 소주 도수를 낮추는 경쟁이 계속됐다"고 했다.

순한 술 경쟁은 올봄 소주에 과즙을 섞어 파는 이른바 '리큐르'로 번졌다. 올해 3월 롯데주류가 새롭게 출시한 '처음처럼 순하리'는 14도. 소주에 유자청 농축액을 섞어 만든 것으로 이 제품은 소주로 분류가 되지 않고 '리큐르(liqueur)'라고 불린다. 롯데주류 양문영 부장은 "이 리큐르가 대학가에서 특히 여대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대박이 났다"고 했다.

유사품도 쏟아져 나왔다. 하이트진로는 '자몽에 이슬'을, 무학은 '좋은데이'에 블루베리·석류·유자즙을 섞은 '블루', '레드', '옐로우'를 내놨다. 순하리의 판매 성장으로 롯데주류는 2002년 15%였던 소주 시장 점유율을 올해 17%까지 올렸고, 2012년부터 매해 5% 안팎 감소하던 소주 판매량은 올해 2.8% 증가했다. 롯데주류 측은 "'순하리 처음처럼'을 내놓은 지 딱 100일 만에 4000만병을 팔았다"고 했다.

순한 술 경쟁이 심화되자 위스키 업계도 움직였다. 2007년 이후 줄곧 하향곡선을 그려온 침체된 위스키 시장이다. 이 와중에 '골든 블루'가 '위스키는 40도'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36.5도로 출시되면서 10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자, 다른 위스키들도 덩달아 도수를 낮추기 시작했다. 롯데칠성이 35도 위스키 '주피터', 디아지오코리아는 35도짜리 위스키 '윈저W 아이스'를 출시한 식이다.

독한 술이 시장에서 밀려나면서 생긴 또 다른 현상은 음주가 더는 아저씨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는 것. 노은정 대리는 "젊은이들이 가볍게 음주를 즐기며 사진을 SNS에 올리는 문화가 확산된 것도 올해 특징"이라고 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소맥 문화'에까지 '작명 전쟁'이 벌어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롯데주류 맥주 클라우드와 소주 처음처럼을 섞어 마신다고 해서 '구름처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해시태그(#)' 등을 통해 퍼져나가자, 하이트진로 측도 '하이슬(하이트와 참이슬을 섞었다는 뜻)'이라는 작명을 퍼뜨리기도 했다.

여성을 잡아라

한국갤럽이 지난달 19세 이상 남녀 10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남성의 경우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술을 마시는 비율이 1994년 58%에서 2015년 52%로 다소 줄었지만, 여성의 경우엔 1994년 8%에서 2015년 18%로 크게 늘었다. 수입맥주 하이네켄을 홍보하는 커뮤니크 신명 대표는 "올해는 특히 맛집을 찾아다니는 유행이 전국을 강타했는데, 이 덕분에 여자들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을 곁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여성들의 까다로운 입맛과 '맛집 열풍'은 주류업계 판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수입맥주 시장은 오랫동안 네덜란드 맥주 하이네켄이 점유율 1위를 자랑했으나, 최근엔 일본 아사히 맥주로 바뀌었다. 관세청이 올해 8월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맥주는 수입맥주의 29.9%를 차지했다. 양문영 부장은 "이자카야 같은 일본 주점이 몇 년 사이 크게 늘어난 영향도 있다"고 했다. 중국 칭타오 맥주의 선전도 눈여겨볼 만하다. 현재 칭타오의 수입맥주 시장점유율은 10.1%. 작년만 해도 매출 순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올해는 대형마트에서 10위권 안에 들 정도로 빠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홍준의 실장은 "양꼬치 집이 크게 늘어나자, 역시 맛의 '궁합'을 따지는 여성 손님들이 칭타오를 함께 마시면서 상승세를 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